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Nov 18. 2024

표암 강세황

삶의 쉼표가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을 스승

세상에 배울 것이 많고 도전할 것도 많으며 완성할 것들도 많다. 그렇게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통 스승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스승의 개념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떤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길을 걷게 해 주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이 진천에 잠들어 있는데 그 이름은 표암 강세황이다. 

예로부터 시․서․화가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의 중심 분야로 대두되면서 세 가지를 모두 잘하는 이를 삼절이라고 불렀다. 진천 강세황 묘소로 가는 이정표를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조선시대에 삼절로 불리던 문인화가로 강희안(姜希顔)을 비롯하여, 윤두서(尹斗緖)와 허필(許佖),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등을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다. 스승으로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이어주었다. 

표암 강세황의 묘소의 이정표를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오래간만에 강세황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진천에 묘소가 있지만 안산에서 활동을 한 강세황은 현정승집을 열었다. 이는 시회로 현정승집도란 1747년 6월 표암 강세황이 복날을 맞아 청문당에서 유경종, 박도맹 등 모두 11명의 선비들이 함께 모여 함께 시를 짓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세상에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 스승의 도를 다하며 후세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재능을 전달해 주었기에 덜 알려져 있지만 큰 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림이었다.  

진천의 강세황 묘소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세황의 삶을 생각하며 허투루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가 시를 짓고 음악을 만나보았던 청문당에는 만권이나 되는 서적이 보관돼 있어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표암 강세황은 시골에 묻혀 살았으나 영조와 정조에게 많은 배려를 받다가 1773년 무려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데 그 후 관계에서 일하다가 1790년 78세에 지중추(知中樞)가 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난다.

대장간, 쟁기질, 타작, 기와이기, 주막, 새참, 우물가, 길쌈, 활쏘기 등 서민의 노동과 일상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화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모임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고 볼 수 있다. 

강세황이 그린 그림이 모아둔 것이 송도기행첩이다. 강세황이 1757년 음력 7월 사수(士受)와 함께 개성을 여행하면서 그곳 주변의 경승지를 그린 그림들에는 산이나 바위 등의 표면은 밝고 투명한 채색 기법으로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특히 윤곽선에 잇대어 짙은 색을 칠하고 차츰 옅어지는 식의 음영 효과는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을 보여준다.  

후대의 사람들은 강세황의 그림을 강세황의 나이 45세를 기준으로 초기와 중기로 나누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큰 것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남긴 작품들은 후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세상에 항상 멈춰 있는 것들은 없다. 세상은 언제나 변하지만 자신의 활동들을 통해서 변화 속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느끼게 만든다. 표암 강세황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수많은 가치를 만들어낸 것들에 대한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의 결성읍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