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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정 May 10. 2022

제주 반달살기_한경면 고산리를 기억하며

한국인이라면 제주도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다보면 가끔 ‘이게 지금 내 인생의 잭팟이 터진게 아닐까’ 라는 강렬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제주도 반달살기 체험을 제안받았을 때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 머리가 아팠고, 밀린 사진정리와 글쓰기로 하루도 쉬지 못하면서 목의 근육이 잔뜩 뭉쳤지만 제대로 풀지도 못한 채 매일 컴퓨터 앞에서 시달리던 날들이 이어지던 그 즈음이었다.


그리곤 모든 일정을 다 바꾸었다. 보름 간의 기간동안 절대 바꾸기 힘들 거라 믿었던 강의가 2차례 있었는데 공무원들이라 절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문의를 드렸더니 내 사정을 이해하곤 흔쾌히 날짜 변경을 해주었다. 재직중인 회사에서의 미팅은 화상회의로 대체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로써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제주도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가도가도 설레는 제주도. 갈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을 내게 선보여주는 제주도! 최소한의 짐으로 살아보려고 기내용 트렁크 한 개와 배낭 하나를 메곤 당당히 그리고 씩씩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내가 보름간 머문 곳은 서남쪽에 위치한,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작은 마을이다. 매일 걸어도 사람은 2~3명 마주치는, 오히려 강아지가 더 많이 보이는 그런 동네. 작지만 내게는 위대했던 동네로 지금은 기억한다. 동네를 걸어 다니면서 현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얻으면서 꽤나 평화로웠던 시간들. 늘 바쁘게만 살았는데 이곳에 오니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져서 좋았다. 내가 머문 숙소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높은 건물에 거실에는 실내 풀장이 있는, 조금은 특별한 숙소 ‘모켄풀빌라 제주’였다. 주로 장기간 체류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의 각 집 앞에는 쿠팡에서 배달 온 박스들이 가득 쌓여 있고 자전거, 유모차 등이 놓여 있는 곳들이 많이 보이다 보니 그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여느 아파트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부는 복층의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아래층에는 거실과 주방, 침실은 위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살짝 무섭기도 했다. 공간이 워낙 넓은데 혼자이다 보니 침대방의 불을 켜 놓고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황홀할 만큼 놀랐던 건 이 곳에서의 일출. 내가 누워 자던 침대에서 보이던 실시간 일출이라니. 그것도 한라산 뷰! 이건 기대치 못한 큰 수확의 느낌이었다. 매일 이 느낌이 너무 좋아 친구들에게 일출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하고, 알람을 일부러 일출 시간에 맞춰 일어난 뒤 풍경을 감상하곤 다시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낮이면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일하는 것이 좋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 그저 밭. 그것도  파릇파릇한 것이 아닌, 아직 뭔가를 심지 않은 야생의(?) 흙 밭. 하지만 그 흙빛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관광을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이상하게 자꾸 집 생각이 나면서 들어오고 싶어지기까지 했으니, 이정도면 나름 꽤 잘 적응하며 궁합을 맞춰 나갔던 듯싶다. 


동네에서 기억나던 명소가 몇 곳 있다. 유명제과에서는 막걸리 넣은 술빵을 제주 보리빵의 형태로 만들어 팔고 계셨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오죽하면 이주간 거의 매일 들러 주인분과 얼굴을 익히며 안부를 전하기까지도! 요이땅삐삐라는 곳은 이 조용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화려하던 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마법처럼 색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젊은이 하나 없을 것 같았던(?) 고산리의 청춘들이 밤마다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 모두가 시끌 벅쩍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비정기적으로 라이브 음악 연주까지 진행되어 더욱 기분이 업 되던 곳. 마치 동남아 여행지에서의 바처럼 말이다. 급, 몹시 해외여행이 그리워지던 순간이기도 했다.

 

무명서점이라는 곳은 길을 가다 우연히 간판을 발견하곤 찾아가게 되었다. 작지만 알차고, 단단하게 영글어가는 책방의 느낌이랄까. 조용하고도 정숙한 공간에서 분명 사진촬영을 하면 너무 튀고 소리도 클 것 같아 주인장님께 허락을 받곤 몇 컷 사진을 찍어 오기도 했다.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 독립출판을 통해 출간도 진행하신다고 한다. 가장 맛있었던 먹거리는 별돈별의 흑돼지구이! 제주도 돼지고기야 언제나 옳은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곳은 분위기까지 갖추었더라. 야자수와 파라솔, 알전구, 정원, 불멍이 있어주니 이건 뭐 완벽한 데이트코스! 낮과 밤, 두 번을 방문했는데 각각의 느낌이 달라 이를 즐기는 재미 또한 좋았다. 낮엔 하와이, 밤이면 발리 느낌 충만한 돼지고기 맛집! 아~ 지금도 아른거리는 야자수와 파라솔의 흑돼지 향연이여! 고사리가 들어간 치킨은 또 어떻고?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던 곳. 사실 기대없이 갔다가 허걱하고 놀랐다. 제주의 고사리가 들어간 치킨과의 콜라보라니! 어쩜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신 걸까? 다음 날 또 먹으려고 전화했더니 품절이란 말에 어찌나 좌절했던지. 하마터면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연장해버리곤 치킨 한 번 더 먹기위해 그곳에 남아있을 뻔! 


당산봉, 수월봉, 차귀도… 모두 이곳에서 가기 좋은, 이름난 관광지들. 소문대로 모두 좋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머물던 숙소에서 거실의 밭 뷰를 즐기며 음악을 듣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음을 밝힌다. 내 인생의 제주도 잭팟이 언젠가 다시 터진다면, 나는 다른 곳이 아닌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 꼭 다시 가고 싶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에게 다시 눈인사를 건네며 웃어 보이고 싶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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