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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리얼리스트 Oct 05. 2019

그린 북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가가는 방법


X나 로맨틱하네 ; Fxxucking Romantic!


편지를 쓰는 토니(떠벌이)에게 넌지시 로맨틱 문구를 던져주는 돈 셜리 박사(피아니스트)


상남자 토니는 아내 돌로레스에게 편지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하루 일과들을 나열하고는, "P.S. 애들한테 키스해줘"만 무심하게 끄적일 뿐이다. 그걸 지켜보는 돈 셜리 박사. 천재 피아니스트 아니랄까 봐 한심한 듯이 피식 웃고는 감성적인 편짓말들을 쏟아낸다. 토니에게 그대로 받아 적으라며. "당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어." 숨 쉬듯 자연스레 나오는 로맨틱한 어구들에 토니는 혀를 내두른다.


내가 그린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셜리와 토니의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이 편지 에피소드도 계속 진행되는데 영화의 말미에는 토니 스스로도 로맨틱한 어구를 작문할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영화 내내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던 토니가 갖은 사건, 사고 앞에서 나약하기만 하던 셜리에게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드러내며, 두 남자가 일방적인 도움이나, 딱딱한 고용-피고용의 관계가 아닌 서로 진정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토니의 대사를 빌려와서 이 영화를 표현하자면, 정말 심플하게 로맨틱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아름다운 미국 남부의 풍경, 셜리가 연주하는 감미로운 음악, 둘 사이에 피어나는 짤막한 에피소드 등 얼핏 보면 관계없어 보이는 스토리라인을 이어놓지만, 그 속에 은유된 메시지가 분명하기에 어느새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알게 된다. 


나는 이런 터치의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 누구나가 다 그럴 것이다. 자극적인 주제를 가져다가 쓰더라도, 그걸 소화하는 방식이 투박하거나, 노골적이면 사람들에게 촌스럽고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흔히들 말하는 '국뽕'영화가 욕을 먹는 이유는, 굉장히 단순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너무도 유치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애국을 하자!"라는 키 프레이즈는 요즘 앵간한 소년만화에서 던지는 철학적 질문보다도 더 단순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으니, 눈이 높아진 한국 관객들의 성에 찰리가 만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통해 이야기를 매끄럽게 그려낸 것이 좋았다.   


저 집이 백인의 것이 아닌 흑인 셜리의 것이다, 둘의 차이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의 진행이든, 주제의 전달이든 모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어느 하나 톡! 튀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가는데, 그 와중에 초반에 적립한 캐릭터들의 대비는 굉장히 뚜렷하다. 아무래도 이 두 주인공이 이리도 대조적이라 전체 스토리나 주제의식에 강한 힘을 주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클럽에서 일하는 해결사로, 동네 사람들이 모두 'Tony Lip'(떠벌이 토니)이라고 부를 만큼 야무진 입담에 호탕한 피지컬로 인생을 쉽게 쉽게 살아가는 백인이다. 그에 비해 영화 내내 사람들에게 'Doctor'로 불리는 돈 셜리(마허 샬라 알리)는 천제적인 실력을 지닌 피아니스트다. 기존의 인종차별 영화와의 차이점은 백인인 토니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서민이고, 돈 셜리가 먹고사는데 걱정 없는 부르주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들의 옷차림, 말투, 행동을 자세히 보여주며 이 둘이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사람인지를 강조한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스무스한 이야기 진행만큼,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은 스무스하게 일상 속에 박혀있다. 영화의 초반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흑인 인부들이 입을 댄 유리잔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고, 돈 셜리(마허 샬라 알리) 박사는 백인 자신들에게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초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들과는 다른 화장실을 쓰며 심지어 통금시간도 따로 있다. 양장점에 가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옷을 입어보지 못하는 셜리의 모습을 보면 절로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The Dignity always Prevail.


엘리트 백인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칠 정도로 멋진 연주를 보여도, 무대 아래에선 그저 흑인이었다.


셜리가 마주한 차별은 가장 극복하기 힘든 차별이다. 대놓고 폭력을 사용하고, 계급을 나누는 차별이라면 오히려 반발하기도 쉽고,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쉽지만,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인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생활 속에 만연하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별에 대응하는 셜리의 방식은 자신의 존엄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불합리한 대우를 보고도 거기에 비난을 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 그저 고고한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상황을 비껴간다. 셜리의 고고한 반응과 자태에 인종차별을 일삼는 백인들은 항상 한 수 접고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토니와의 마찰이 항상 발생한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빠른 상황 해결을 원하는 토니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해결책이 신통치 않아 보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셜리의 방법론이 옳다는 점은 반박할 수 없다. 어쩌면 가장 '백인 남성' 다운 토니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셜리를 남부로 데리고 가는 동안에도 둘은 숱하게 싸운다. 토니가 옥석을 훔쳐왔을 때, 켄터키 치킨을 길바닥에 집어던질 때, 셜리가 백인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이따금씩 폭력을 당할 때 마저도... 그러나 셜리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이 둘은 서로의 존엄성을 절대 해치지 않고 서로 존중한다. 참고 참으면서. 


그런 인내심의 결과일까? 작품의 초반부에 흑인 인부들이 마신 유리잔을 버리던 토니는 극이 진행될수록 흑인에 대한 혐오감을 누그러뜨리고, 마지막 크리스마스 씬에선 흑인을 함부로 말하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홀로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싫었던 셜리가 그의 집에 찾아왔을 때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셜리를 껴안아 반겨주는 토니의 모습과, 토니 가족들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白眉).




천재로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한 거였죠.


셜리는 가엾은 사람이다. 흑인들에겐 너무 부유하고 고고한 엘리트라서 외면받고, 백인들에겐 검은색 피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외면받는다. 우아하게 연주를 들어주다가, 연주가 끝나면 나는 그들에게 깜둥이일 뿐이라는 셜리의 자조적인 대사는 그가 얼마나 외롭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다고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저렇게 자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셜리는 용기를 내 남부 순회공연을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다. 허나 결국 인종차별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식당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셜리의 용기와 결심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정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셜리는 크리스마스에 토니 집에 찾아간다는 새로운 종류의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로서 높은 가치가 있는 돈 셜리가 아닌, 그저 흑인 친구로서 다가간다는 것. 엘리트이기에 더 힘들었을 결정이기에 두 주인공의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돈 셜리로서 친구를 사귀고, 장난스레 연주할때 가장 환하게 웃었다.


흑인과 백인 모두 섞여 있는 미군에서 21개월 복무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인종차별은 돈 셜리 박사가 마주한 것처럼 사람들 마음속 근본 의식에 자리 박혀있거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지 않다. 영화 속에서는 셜리를 옹호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일탈이었다면, 이제는 인종차별적 제스처, 발언을 하는 것이 추태가 되었다. 당장 승승장구하는 유명인사라고 할 지라도 인종차별적 모습을 보이면 욕을 먹지 않나.


정상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선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저급하고 비상식적이란 관념이 뿌리내린 것이다. 물론 흑인들 입장에선 나 역시 제3자이기에, 감히 그들의 일상과 고뇌를 공감하지 못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본 사회에선 인종차별이 근절되지는 못했을지언정 많이 누그러진 모양새다.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셜리와 같은 사람들의 용기가 만들어낸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토니가 변했듯 우리도 변했겠지.


혐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선 최근 느낀 점이 많아 후에 따로 다루고 싶다. 누구나 다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나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제로 혐오에 맞닥트리는 상황이 닥친다면 저급하게 행동할지도 모르지. 그때마다 영상 속 셜리 박사의 고고한 자태와 환한 미소가 떠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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