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리얼리스트 Oct 06. 2019

조커「Joker」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광인(狂人)의 분노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조커 포스터.  시작하는데 없으면 또 섭섭하지

10월 2일에 개봉을 한 이후로, 최근 영화관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영화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조커'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작인 다크 나이트에 등장. 전례 없이 인상적이었던 빌런, 조커의 솔로 무비라니..! 더군다나 히어로 영화 계통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마블(Marvel)조차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작품상을 보란 듯이 받아버린 영화라니! 굳이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고 주변 친구들의 기대에 찬 모습만 보더라도, 사람들이 영화 조커에 가지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의 히어로-빌런 무비와 비교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은, 악당을 특별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상정했다는 점이다. 한 네티즌의 조커 감상평에는 이런 말이 있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악의 화신이지만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상징이라고 느껴지는 반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라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악당인 조커가 관객들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여타 슈퍼히어로나 빌런들처럼 초인적인 사건이나 물질의 힘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켜켜이 쌓여 망쳐놓은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빌런의 기준을 그가 가진  설득력 있지만 악(惡)한 철학에서 찾았다면, 이 영화의 조커는 그 탄생 배경이 지금까지의 악당들과 구분된다는 점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나의 죽음이 내 삶보다 더 가치 있기를...


조커의 주인공 아서는 도입부에 정신 상담을 받을 때부터 위의 구절을 자신의 노트에 적어두고 다녔다. 자신의 죽음이 삶보다 더 멋있기를, 더 의미 있기를. 결과적으로 그를 둘러싼 거지 같은 환경들은 아서의 극단적인 행동과 어우러져 그를 반(反) 체제의 상징으로 만들어 냈고, 아서의 죽음은 조커의 탄생으로 치환되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었다.


폭력의 아픔, 타인의 조롱을 받아내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서서히 격리되는 아서.


아서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는 '쓰레기' 그 자체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서는 앙상한 영양실조의 몸, 계속되는 틱 장애를 가진 아웃사이더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사랑으로 보살폈던 하나뿐인 어머니, 페니는 알고 보니 망상장애를 지닌 채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장본인이었다. 꿈을 키우며 롤모델로 삼았던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은 아서가 망신당했던 영상을 가져와 공중파에서 생중계하며 아서를 조롱한다. 거의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던 여자 친구는 알고 보니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환청이었다.


개인적 환경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 때, 사회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광대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서는 지하철에서 백인 남성들에게 폭행당하고 거리에서 온갖 멸시와 고통을 받는다. 성격이 음울하고 특이하다는 이유로(사실 근본적인 이유는 있었지만) 광대 업계에서도 퇴출된다. 그 와중에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복지제도 마저 중단되어 아서는 기본적인 약과 상담마저 받을 수 없게 된다. 어머니 페니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된(혹은 믿게 된) 자신의 아버지, 억만장자 토마스 웨인은 자신을 없는 사람, 쓰레기로 취급하며 무시한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무자비함, 냉혹한 현실은 아서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를 억누른다.     


아서는 결국 자신을 억누르던 것들을 치워버리고, 조커로서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가기로 한다.


아서는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등져버리기로 결심한다. 결심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능동성만큼, 아서에게 선택권이 있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는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커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였으면 진작 자살했을 만큼 그의 환경과 정신상태는 좋지 않았기에...


아무튼 조커로서의 자아를 확립한 이후, 아서는 더 이상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웃게 되는 틱 장애를 겪지 않는다. 백인 남성 셋, 자신의 어머니 페니, 자신을 쫓던 두 형사, 롤모델이었던 머레이를 모두 직간접적으로 살해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무례하고, 책임감이 없으며, 예의가 없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즐겨보는 영화평론 유튜버 라이너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혼돈의 광(狂) 태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서라는 고치를 뚫고(죽이고) 나타난 조커라는 성체는 그렇게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다.




그 세명의 죽음이 그렇게 슬픈가? 단지 그 토마스 웨인이 그들을 추모했기 때문에? 내가 죽었으면 그 시체를 밟고 지나갔을 거면서!


조커는 히어로 영화의 스핀오프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상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도 모방범죄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영화다. 실제로 Involuntary Celibate, 소위 인셀이라 불리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읭?), 극단주의자 집단은 어느 특정 조커 상영관에서 총기 테러를 가할 계획을 다크 웹에서 의논했고, FBI와 미군이 현재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주제 자체가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사람들은 역성혁명을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다시 한번 고찰해봐야 한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잃을 게 없어진 자들이 자신들에게도 정당한 권리를 달라며 혼란과 일탈을 일삼는다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극 중의 토마스 웨인이나 다른 부유층처럼 가진 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소외계층 사람에게 "그냥 현실에 순응하고 짜져 살아"하는 것이 아니다. 소외계층에게도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하자는 PC운동을 하려면, 그 과정 역시 정당하고 올바라야 한다. PC(Politically Correct)하려면 pc(procedurally correct) 해야 한다.


모방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영화의 주제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허나 필자는 토드 필립스 감독도 이 점을 분명히 신경 써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조커의 공개 살인으로 아수라장이 된 고담시, 조커가 시위대(라고 쓰고 범죄자라고 읽는다)에게 둘러싸여 도로 한복판에서 혼돈의 상징으로 태어날 때, 영화관 골목 한 구석에선 그들의 반대급부, 어둠의 정의를 상징하는 배트맨이 태어나고 있었다. 조커 모방범에게 부모님을 살해당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결국 올바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는 필연적으로 똑같은 아픔을 가진 자들을 양산하고(여기선 아버지를 살해당한 브루스 웨인), 그들에 의해서 다시 체제가 전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그 한순간 자유를 만끽하던 범죄자들은 후에 배트맨이 된 브루스 웨인에게 모조리 다 잡혀 들어갈 운명인 것이다. 누구나가 다 아는 배트맨의 이야기를 조커 영화에 곁다리로 삽입한 점에서, 감독은 분명히 그 의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당신은 내 말을 한 번도 이해해보려고 한 적 없잖아.


아서의 울먹이는 얼굴을 지나치는 사람들 만이 그의 곁에 있을 때, 그 속에서 조커가 태어난다.


글의 도입부에도 이야기했지만 조커라는 악당은 증오, 조롱, 멸시, 계급구조 등등 우리 사회의 복합적인 부정적 단면들이 쌓여서 만들어 낸 괴물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아서가 그 지경이 되는 동안,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야윈 등을 토닥여주며 다독였다면 악의 화신, 혼돈의 광(狂) 태자는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당장 자신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난쟁이 광대를 살려주는 조커를 보면 알 수 있다.  상담의에게 위의 대사를 나지막이 읊조리는 아서의 표정이 유독 애잔해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영화 조커는 집요하게 사회 병패를 꼬집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빈부격차, 마땅한 사회보장의 부재, 총기 소지 문제, 부패해가는 행정력, 거기에 곁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인간성 소멸까지... 우리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어야 할 민감한 문제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영화의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지만, 이런 영화 한 편 때문에 극단적인 모방범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우리의 현 사회가 피폐해졌다는 것이 한편으론 가슴 아프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책을 보면, 꼭 아서처럼 사회로부터 격리되야만 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의 독일 나치군 병사나 장교들처럼, 사회에 너무 순응하고 이입해서 행동해도 순식간에 악이 되어버린다. 사회의 규칙에서 너무 벗어나도, 너무 순응해도 우리는 주체성을 잃고 악이 된다. 중요한 건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최소한 우리가 제대로 향해 가고 있는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 과정속에서 누군가는 잘못가고 있던 길에서 돌아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기 옆에 다른 누군가를 보살펴 줄 수도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그린 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