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하와이에 가게 되었는가
최근 몇 년간 나의 생활은 '일'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만성피로, 자괴감, 무력감 등으로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몇 년 동안이나. 아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자잘하게 하고 싶은 건 많아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지. 연애도 나에게는 마찬가지인데, 그걸 답답해하는 사람들은 연애를 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너그러워지니 연애를 하라고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도 아니고. 어쨌든.
2016년 내내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작년 12월, 나는 팀장님에게 면담 신청을 해서 울면서 퇴사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 프로젝트'를 하느라 고생한 게 아깝지도 않으냐. 연봉협상 때까지 기다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다.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1월
메일로 연봉 통지서가 왔는데, 정말 실망스러웠다. 회사의 입장을 백번 고려하여 내가 생각한 최소의 마지노선의 1/2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상폭이었다.
이의제기를 한 결과 기존 인상폭에서 1%가 올랐다. 1%가 오른, 회사에서 가장 높은 등급만이 받을 수 있다는 연봉 인상률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거부하는 순간 회사를 나가는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2015년 4월 입사 이래 한 번도 연봉이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인상된 연봉의 소급적용분도 절실했고 마이너스된 연차도 회복하려면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앞으로는 딱 연봉만큼만 일하겠다고 생각했다.
설날 연휴에는 더운 나라로 여행을 갔다. 친한 대학 동기 5명 중 결혼을 하지 않은 무부녀 3인의 여행이었다. 휴양지로 여행을 간 건 처음이었는데 추운 서울을 떠나 필리핀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낸 5일은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다.
2월
나와 마찬가지로 연봉에 불만을 품은 막내는 연봉 조정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다른 회사를 알아봤고, 심지어 좋은 조건으로 오라는 곳을 여러 곳 만들어냈다. 막내가 이직을 확정하고 퇴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3월
연봉만큼 일하겠다고 한 건 그냥 내 생각이고, 회사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를 올해도 진행하게 되었다. 작년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담당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외에도 작년 12월부터 진행되던 지지부진한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그 큰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나 싶을 정도로 일을 못하고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내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면서 '아니야 내가 일을 못하는 걸 거야.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걸 거야' 하면서 일을 했을까.
적재적소(?)의 일들과 담당자들의 활약으로 나는 퇴사를 결심하고 팀장에게 다시 한번 얘기를 했고, 그도 나를 두 번은 잡지 못했다.
4월
사의는 표명했으나 퇴사일을 지정해주지 않아서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이렇게 다시 쓰면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자니 진저리가 난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번 퇴사일 지정해달라는 얘기를 했지만 회사는 계속 질질 끌어 결국은 내가 생각한 데드라인인 4월 말로 퇴사일이 정해졌다.
하지만 입사 연도 기준으로 발생하는 연차가 4월에 발생하여 공식 퇴사일은 5월 중순이 되었다. 럭키!
'이 일만 마무리해주고 갈 수 없냐', '퇴사일을 언제로 하느냐', '사람이 없는데 인수인계를 누구에게 하느냐'... 이런 문제들로 매일이 시끄럽던 사이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을 보러 갔고, 최근 들어 건강이 안 좋으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수많은 일들로 마음이 복잡했고, 말 그대로 잔인한 4월이었다. 부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와서는 인수인계를 하고, 송별회를 하고, 마지막 근무를 하고, 퇴사한 다음날에는 역시 오래전에 계획되어 있던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떠났다.
퇴사를 하고 무엇을 할지는 퇴사를 마음먹고부터 생각했는데, 처음 생각한 건 교토에서 1달 정도 생활하는 것처럼 여행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러기엔 도쿄도 아쉽고, 홋카이도도 가고 싶네. 교토 2주, 도쿄 1주, 홋카이도 1주 이렇게 가는 건 어떨까. 오사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가고, 도쿄에서도 이번에 개통한 신칸센을 타고 하코다테까지 가는 거야.'
그러던 중 시즈오카의 서점에서 '하와이'라고 크게 써진 '하나코'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바다, 모래, 여자 혼자, 머리에 쓴 꽃(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 것의 이름은 '레이'), 타이틀... 표지가 이목을 확 잡아끌어 계속해서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휘휘 넘겨보았다. 하지만 이내 확실히 갈 것도 아닌데 일본어로 된 책을 사기엔 좀 오바가 아닌가 싶어 내려놓았다.
나중에 친구가 다른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들이대면서 '하와이 가라'라고 했다. 아, 이것은 운명인가.
5월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과장님이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다녀와서 나에게 말했다.
'과장님 하와이 가. 과장님은 하와이 가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애.'
이유인즉슨, 하와이는 일본어가 잘 통하니 가서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 여행을 해도, 혹은 생활을 해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흠, 그래요? 라고 넘겼던 일이 가슴에 콕 박혔는지 생각이 났고, 올해 처음 경험한 섬나라 휴양지의 느긋함이 그리워 결국 하와이행 항공편을 구매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영어 쓸 일이 너무 걱정된다.)
일본 서점에서 살까 말까 고민했던 저 책은 결국 한국에 와서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했다. 그 얘기는 다음에...
(6/1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