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도 짤없이 오전 수업을 진행합니다. 멀리서 오는 아이가 꽤 진지하게 책을 읽다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흉년이 뭐예요?" 아이의 독서이력으로 볼 때 흉년을 모를 리 없겠지만, 오늘에서야 거치적거림을 느꼈나 봅니다. 보기가 흉하다는 문장을 예를 들어, 한 해 농사를 재해나 병충해로 망쳐버렸으니 흉한 일이겠고, 반대로 농사가 풍성한 결실을 맺으면 풍년이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서너 가지 연관된 어휘를 이야기를 빌려 넌지시 말해주자, 아이는 세상의 이치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습니다.
흉년과 풍년이라는 단어가 괜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날입니다. 흉하다는 말은 여러 뜻 중에 "일이 나쁘거나 궂다"라는 뜻이겠지요. 흉하다의 "흉"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흉할 흉(凶)'에 몰입해 볼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니까요. 눈에 띄지 않던 어떤 단어는 어느 날 이렇게 찾아옵니다. 매우 익숙하던 일상어를 아이들이 물어옵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니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말과 글에는 분명 어떠 이유가 있으니 잠시 멈추어 찾으면 그만입니다.
"흉"은 운이 사납거나 불길하다는 뜻, 생김새나 태도가 언짢거나 징그럽다는 뜻과 성질이 내숭스럽고 거칠다고 국어사전에 나옵니다. 흉하다의 반대말은 '길하다'입니다. 흉년의 반대를 길년이라고 쓰거나, 풍년의 반대를 흉년이 아닌 빈년이라고 쓰지 않는 이유까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궁금했지만 더 확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생각은 다른 길로 흘렀습니다.
우리에게 상투적이고 일상의 널린 말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해 고정되고 역사성을 가진 언어의 특징 때문에 소멸, 생성, 변화를 거칩니다. 흉년과 풍년의 대치의 이유는 모르지만, 농경사회에 결실의 유무가 생사화복의 근간이 되는 세상에서 먹거리의 결핍은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이 됩니다. 단순히 풍성하지 못한 결실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궂은 농사의 결과가 사납과 불길하기까지 한 것이었겠지요. 하루 두 끼를 겨우 먹을 수 있었고 보릿고개에는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연명했던 목숨이 이어 이어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당도했다는 사실에 사뭇 진지해집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질문을 하고, 글을 씁니다. 고요하고 느슨한 토요일이 이렇게 지나갑니다. 아이들을 가끔 째려보며 집중하라고 눈을 부라리면서도 게으른 잠을 이기고 제 할 일을 하겠다고 머리를 굴리는 아이들이 기특합니다. 그 옆에 앉아서, 흉한 세월을 이기고 지금에 도착한 역사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고단해 보입니다. 고단한 결실이 지금 우리이며 이 사회라면, 사망에 이르지 않고 변화 발전을 거듭함에 웅장함을 느낍니다. 대신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하는 요즈음을 무시할 수 없어 숙연함도 겸하게 됩니다. 고즈넉한 토요일 오전, 흉년이라는 질문 덕에 거창한 사유를 유영하며 오글거리는 글을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