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心한 페어런팅 #8
아이가 처음 공방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부드러운 말씨의 엄마의 설명에 묻어나던 여린 아이가 아니었다. 또래보다 키가 컸고 눈빛이 매서웠다. 책을 개별적으로 읽고 있는 적막에 조금 위축되었는지 어깨를 조금 구부정하게 한 채 자리에 앉았다. 숙지사항을 알려주고, 앞으로 겪으면서 궁금할 때마다 물어보라는 여지를 남겼다. 다 떠다 먹여주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와 모르는 것을 묻는 것에 대한 요즘 아이들의 결벽증 같은 거부감을 깨기 위한 생각한 나름의 케어 방법이다. 아이는 한 시간 동안 5개의 루틴으로 돌아가는 수업방식을 익히는 데 며칠이 걸렸지만, 도무지 도움을 요청하는 법이 없었다. 모르는 것을 묻기 위한 용기,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어려움에 대한 요청, 화장실 사용의 허락을 구하는 말들. 아이 스스로 보여주는 행위가 없으니 그저 잘 따르는 유순한 아이로만 보였다.
모르는 어휘를 찾아 적고 의미를 익히는 활동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이는 의자 바닥에 미끄러지듯 겨우 꼬리뼈를 좌석 끝에 위태하게 달랑거리며 눕다시피 했다. 자세를 다시 바로잡도록 했지만 아닌 돌연 "피곤해요"라는 말을 했다. 따로 불러 면담을 했더니, 아침에 형 때문에 일찍 깨어 피곤하다고 했다. 저학년 또래와 달리 아이의 스케줄 이동 반경이 넓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는 멀었고 하교 후 학원가로 차량 이동해 와서 여러 군데를 돌았다. 피곤할 법하지만 배고프다거나 입이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다니는 또래와 사뭇 다른 느낌의 저항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이에게 압력을 가한 어떤 조짐도 없었지만 아이는 연신 피곤한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하기 싫다'를 온몸으로 뿜고 있었다.
아이의 수동적인 모습의 이유를 고심하는데 아이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의 상태를 소상히 알리는 엄마의 열렬함과 애정이 전해졌다. 마치 내가 아이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마주하고 망연자실할까 봐 오래 고민하다가 전화를 건 것 같았다. 묻지 않는 말을 쏟아냈다. 아이의 상태, 아이의 무기력한 모습과 피곤에 대한 무죄함을 속사포처럼 쏟는 태도가 마치 대변인 같았다. 상담 관련 직종을 가졌는지 사례와 아이의 경향과 타고난 기질을 전문가처럼 전달해주었다. 아이는 또래가 한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이후 해야 하는 활동에서 아이는 수월하게 넘어가는 게 없었다. 거부하지 않지만 좋아서 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처음이면 어색하다는 이유를 붙이겠지만 몇 번의 만남으로 아이의 무기력, 수동성에 빨간불의 이유를 진단할 필요가 있었다.
엄마의 다정하고 세밀한 관심과 설명은 아이가 출석할 때마다 이어졌다. 엄마의 정성과 관심의 이면에 "내아가 좋은 아이"임이 가득 깔려있었다. 아이가 이상행동이나 부정적 반응을 하거나 수동적일 때, 상황의 이유를 설명했다. 나도 아이를 키운 엄마로서,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과한 정성스러움과 아이를 향한 안쓰러움과 아이 대신 나서는 태도는 나쁘지 않지만, 나쁘게 작용할 수 있다. 아이 엄마 태도와 아이 반응의 상관관계를 연결하지 않으려 해도 연결되곤 했다.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아이의 상태를 잘 알리고, 문제 해결 방법과 목표지점을 전달해서 성장을 위하려는 말에도 아이를 대신 변호하는 상황은 이어졌고 "어머니, ~가 피곤할 수 있고, 제시하는 게 어려울 수 있어요. 그건 **의 탓이 아닙니다. **가 잘할 수 있는 능력치를 높여주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문득 '두 아이가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선생님이 오해해서 미움받고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 강한 아이가 우리 아이를 조종하면 어쩌나'라고 전전긍긍하던 육아 초기가 생각난다. 아이가 다 표현 못하니, 내 아이가 어눌하게 말하니 엄마가 대변해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하고 3학년이 되던 해, 작은 아이가 "엄마, 엄마가 선생님한테 문자 보내지 마. 내가 이야기해볼게." 아이가 느꼈을 민망함과 자신의 문제를 엄마가 대신 나서는 상황의 불쾌함등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 스스로 말해보고 안되면 엄마가 나서도 늦지 않다는 사실이 당시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의 말에 큰 것을 깨달은 후 웬만하면 아이가 요청하기 전에 내가 나서지 않는다. 필통을 두고 가거나 중요한 숙제를 빠트려도 "힘든 상황을 겪어도 배울 게 있다"라는 생각을 기르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자녀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으며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주고 공감해주고 다정한 엄마에 비해서 얄짤없는 게 왜 안 힘들겠는가. 성장에서는 이런 렉이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을 부모가 대신 피하도록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엄마가 대신 아이의 입장을 설명하지 않아도 교사라면 아이의 상태를 살펴 파악할 수 있다. 기관이든 아이의 사적인 사회관계든 부모의 개입이 많다면 아이가 겪어야 할 경험을 빼앗는 것이고, 아이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고 조율하는 힘을 눌러버리는 작용을 하는 게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 아이가 오해받을 수 있지만 결국 헤쳐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도 아이의 몫이다. 아이의 자생력 성장을 위해 조금 무심하고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부모가 되어보는 것을 다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