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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Apr 05. 2023

시감상 <큰 꽃>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힘 다해 피워놓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 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ㅡ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이 시를 찬찬히 곱씹는다.


"꽃을 내려놓은 봄나무는

제 이름을 내려놓는다."

이 부분에서 멈춘다

수종을 구분하는데 많은 요소가 있다. 나는 기껏해야 이파리의 모습이나 꽃의 모양 정도를 보고도 겨우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 식물에 대한 지식이 짧아 항상, 풀이나 나무 정도인 줄 알고 지나쳤다. 그리고 애써 나무는 나무들일뿐 나무의 종류를 분간하는 게 삶에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휘뚜루 마뚜루한 태도로 공을 들여본 적이 없다. 시골출신이지만 학령기 전 상경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연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로 여태껏 살아왔다. 나의 지인들 중 수종을 잘 아는 이도 드물었으니 '중요한 시선'이 아니라 넘겨버리는 태도에 궁색한 변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흔하디 흔한 풀과 나무의 이름을 잘 몰라 물어볼 때, 낯이 붉어지곤 한다.  때론 그것이 죄스럽기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굳건히 살아있기 때문에 인간이 기대어 사는 것이라면 '그들의 이름정도를 꿸 수 있는 게 예의 아닐까'싶어서다. 함께 오랜 세월 함께 하는 이의 이름을 타인과 구분할 수 없다면 미안함에 그치지 않고 죄스러울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이 시를 감상하면서 서두가 길었다.


시인은 꽃이 진 나무가 이름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확장되어 신록이라는 더 큰 이름을 부여받는다고 한다. 푸른 숲이라는 정체성으로 더 큰 경계로 지칭해 준다. 도리어 꽃이 지지 않는다고 반어적으로 말하며 꽃을 떨어트리고 더 큰 꽃을 피워, 나무 자체가 큰 꽃이 된다는 표현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꽃의 색을 지정하고 초록은 이파리에 국한된 색이라는 편견에 갇히면 꽃이 떨어진 나무를 꽃으로 볼 수 없다. 한 덩이의 큰 꽃으로 모습을 상상해 보면, 나무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이파리들이 모여 만드는 윤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머릿속에 꽃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버릇을 버린다면 나무만 꽃이 아니라 동그마니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도 한 덩이의 꽃이라 할 수 있고, 꽃들이 모인 꽃다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인의 눈은 고정되지 않아 사물과 자연을 다르게 보고 비틀어보며 독자들의 시선을 확장하도록 만들어준다. 익숙한 일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을 "시심"이라하며 작가적 시각이라한다.



다르게 보는게 글쓰기의 시작이거나

새로운 도전의 출입문이라고 생각하니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 천지에 봄처럼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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