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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Oct 04. 2019

폭력의 역사에 대한 자기변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

9번째 장편영화

쿠엔틴 타란티노의 기존 작품과 다르다고 한다. 맞는 이야기이자 틀린 이야기라 하겠다. 액션과 폭력을 전면에 내세운 지난 작품을 떠올리면 맞는 이야기, 여전히 총이 등장하고 피가 튀기고, 말이나 과거의 커다란 세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틀린 이야기이다. 10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하고 은퇴 예고를 천명한 그이기에 9번째 장편인 이번 작품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가 연출한 모든 장편은 서부시대, 2차 대전을 다룬 시대극이거나 6~70년대의 정서가 담긴 작품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과거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거나 참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수많은 영화가 현재 그의 창작에 자양분이 되었다.

한땐 잘 나갔는데

 그의 인장과도 같은 과거 정서가 담긴 영화에 굳이 ‘옛날 옛적에’를 앞에 붙인 이유는 순전히 헐리우드에 있다. 비디오 대여점 점원으로 일하며 전 세계 수많은 작품을 봐온 그지만 그 중심은 헐리우드 영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B급 영화는 그의 모든 것이다. 마지막인 10번째 장편을 앞두고(현재로선 <킬빌 3>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로 한다.     

 릭과 클리프의 관계는 액션배우와 그의 스턴트 대역이라는 두 명의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을 가진 하나의 인물과 같다. 릭은 클리프 없이 액션을 할 수 없으며, 클리프는 릭이 없으면 스턴트 배역을 구할 수 없다. 그들은 각각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릭은 음주와 흡연을 통해 억누르지만, 음주운전으로 인해 면허를 잃었다. 클리프는 영화에서만 보여야 할 폭력을 현실에서 과시하다 일자리를 잃고 만다. 둘은 폭력으로 얽혀있고 공생한다. 이번 영화에도 타란티노는 드러나진 않지만, 인물을 통해 폭력성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릭과 클리프의 관계는 후반부로 흐르며 변화를 맞이한다. 릭이 액션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연기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액션이 아닌 연기로 무게가 옮겨가면서 클리프의 존재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폭력의 역사는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때 참았어야 했다.

 샤론 테이트의 등장이 그렇다. 샤론 테이트의 배우 활동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그녀의 등장은 오로지 실제 일어난 살인사건이 전부이다. 릭 달튼의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타란티노는 배우 더 나아가 스타로 대변되는 헐리우드 시스템의 견고함을 이야기한다. 과거 액션 전문 배우도 연기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영화관을 찾는 관객에게 웃음과 만족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전 세계의 이름난 감독과 배우가 모이는 곳, 헐리우드의 기반이 탄탄함을 보여준다. 그 결과로 부와 명성을 얻고 사유도로가 있는 언덕 위 고급 저택에 사는 것이다. 헐리우드의 꿈과 희망을 보여주며, 그것이 유지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릭과 클리프처럼 이 역시 동전의 양면이 존재한다. 클리프는 트레일러에 외롭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 결혼한 샤론과 함께 사는 옛 연인 제이의 윤리성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맨슨 패밀리가 얘기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익숙해진 폭력성은 헐리우드가 가진 시스템의 문제점이자 기반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진다. 타란티노는 과연 자신이 여태껏 보여왔던 영화의 폭력성이라는 문제에 수긍하고 반성하는 것일까? 그는 영화는 그저 영화라고 일축한다.

닮은 느낌이 있다

 샤론 테이트를 영화로 끌어들였지만, 실제 사건과 다르게 변주했다. 맨슨 패밀리가 찾아간 집은 샤론의 집이 아닌 릭의 집이었다. 이는 폭력성에 대한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음 하려는 맨슨 패밀리의 대상 선택이 애초에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죽음을 선사하려는 그들은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데 그 묘사는 비로소 역시 타란티노 영화였음을 알게 할 만큼 잔인하고 처참하다. 맨슨 패밀리 혹은 비판적 의견에 가진 이들의 주장에 영화 속 폭력은 그저 영화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현실과 다르다고 소리 높여 주장한다. 릭과 클리프는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실의 폭력이 총이나 칼로 대변된다면 이것은 영화이기에 영화만이 가능한 폭력을 에둘러 가져와 반격한다. 클리프는 총과 칼을 이기는 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폭력에 대한 이런 논쟁이 시끄러운 듯 헤드폰을 끼고 있던 릭은 뒤늦게 화염방사기를 꺼낸다. 영화적 폭력성이다.     

 클리프는 병원으로 향하고 릭은 결국 샤론을 만나 폴란스키의 집에 들어서게 된다. 액션이라는 장르가 단순히 폭력이 아닌 영화적 표현이고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많은 액션 종사자에 찬사를 보냄과 같다. 실제 사건과 다른 결말은 이것은 영화임을 강조한다. 샤론은 살아남고 릭이 폴란스키의 집에 입성함은 액션이라는 장르가 단순한 오락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받고 더 나은 평가를 받아야 함을 말한다. 타란티노 자신이 사랑하는 그 시절의 영화와 그 안에 담긴 액션과 폭력에 대한 러브 레터와 같다.   

  

 그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되어야 하는 문제인가? 이는 변명과 같다. 영화는 허구이고 환상이지만 현실의 반영이고 묘사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과 같다. 영화 속 폭력을 그저 허구라고 치부해버리면, 영화는 스스로 영화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웃고 울고 감동하는 것은 그것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폭력의 영향력은 대리만족을 통해 해소의 기능을 하지만 누군가에겐 모방의 도구가 되고 폭력에 초연 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개에게 신체를 물어뜯기고 얼굴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온몸이 불에 타는 순간, 최초 웃음이 튀어나오고 통쾌함을 느꼈지만 이내 찜찜함이 엄습했다. 헐리우드의 폭력을 생산한 자들은 정당방위라는 이유로 사건을 인생의 자랑거리로 삼을 것이다. 자신이 그들을 혼내줬다고.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미화되고 과장된 폭력을 보며 자라와 익숙해지도록 주입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분노는 샤론 테이트라는 실제 사건의 끔찍한 만행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에 대한 응징은 정당화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자신이 활약했던 장르에 대한 폭력성을 성찰했다. 영화가 가진 영향력과 파급력이 현실에서 실제 발휘된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다. 영화가 허구에만 머문다면 예술로 인정받기 어렵다. 비평의 영역이 줄어들고 존재 자체에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질문과 답을 스스로 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질문과 답은 자기 영화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변명. 헐리우드의 역사는 영화 속 폭력의 역사와 땔 수 없는 관계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헐리우드의 지난 역사는 그보다 깊은 고민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굳이 폭력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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