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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Oct 15. 2019

팽팽했던 줄이 끊어지는 순간

<조커> 속 계급투쟁의 과정

 

 하얗게 분장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른다. 그가 한 분장은 언제나 웃어야만 하는 광대의 얼굴. 그의 웃음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긋남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 <조커> 속 고담시는 많은 것이 어긋나 있다. 도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행동은 순리와 맞지 않는다.

 병적 웃음을 이유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오는 아서는 항상 요구에 시달린다. 어머니에게는 항상 웃으라고 강요당한다. 직장에서는 불합리를 강요당하고, 도시는 침묵과 복종을 강요한다. 조커의 병적 웃음이 터지는 순간은 바로 이런 강요에 시달리는 순간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순간, 오해를 받는 순간 등 어쩌면 울음이 어울리는 순간 그는 웃고 만다. 뭔가 잘못되어가는 순간, 그는 사실 울고 있다.

 아서의 병적 웃음은 사실 미쳐가는 세상에서 이성을 붙잡기 위한 수단이다. 상담사와 상담을 이어가는 행위, 병적 웃음을 현실에 녹여내기 위해서 선택한 광대라는 직업, 힘겨움 속에도 진심으로 보살피던 어머니까지 그는 힘든 상황 속에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든 탑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도시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범죄는 늘어간다. 폭력은 제어되지 못하고, 아서 역시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사람 간의 신뢰와 믿음은 무너진 지 오래다.

웃는 얼굴로 우는 남자

 아서의 병적 웃음은 사회의 영향으로 기인한다. 신경 손상으로 인한 발병이 원인이지만, 그런 그에게 제공되는 사회의 복지 시스템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망상증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유전적 영향도 입양되었음이 밝혀지면서 타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영화 속 토마스 웨인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트릴로지와 다르다. <배트맨 비긴즈> 속 토마스 웨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 고담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반면, <조커> 속 토마스 웨인은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으로 엘리트주의를 외치는 인물로 등장한다. 고담시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만이 이 도시를 구할 수 있다는 오만을 드러낸다. 과거 부르주아는 중세의 봉건주의를 해체하고 시민사회를 여는데 일조했다. 부르주아가 청부 사상과 결합하여 부의 지향을 자기 욕망을 합리화함으로 정당화하면서, 종교와 권력에 대한 해방을 이데올로기화 하였다. 문제는 부르주아 즉 자본을 가진 자가 시장이 되려고 하면서 권력까지 소유하려 한다는 점이다. 토마스 웨인의 시장 출마는 엘리트주의와 맞물리면서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의 망상처럼 대중은 가진 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만, 권력까지 소유하게 되면 청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가 필요할 정도로 무너진 세상의 어두운 영향을 받은 아서에 대한 동정이 생성되는 이유다.

강렬했던 춤사위

 아서 역시 현실과 망상 사이에 시달린다. 그의 망상은 그의 바람과 같다. 평범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코미디로 인정을 받고 토크쇼에 나가 유명해지는 것. 평화롭고 긍정적인 그의 망상에서 사회가 다시 제 기능을 찾는 모습은 없다. 자신의 행복이 망상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조차 이뤄지지 않는 곳에서 제 기능을 다 하는 사회에 대한 기대는 지나친 욕심과 같다. 개인이 행복을 꿈꾸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곳임을 잔인하게 그리고 있다.

 문제는 그의 망상이 작동하는 시점이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순간, 그는 힘겹게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반면, 이성을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소 행복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이성을 다시 잡으려 할수록, 삶의 고통은 더 가혹하기만 하다. 그의 삶은 망상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웃음이 울음이 아닌 진짜 웃음으로 기능하기 위해 이성을 다신 찾지 않기로 한다. 이성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오르던 계단은 이성을 놓은 뒤에는 춤을 추며 내려오는 무대가 된다. 비로소 그의 무대가 열리는 것이다.

 하필 폭력이어야 했을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현재의 봉건사회라고 본다면 역사 속 혁명에 폭력의 등장은 서구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수많은 혁명이 봉기와 함께 이뤄졌고 성공하였다. 권력과 자본과 같이 이미 사회에 단단히 자리한 계급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툼은 동등한 조건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함으로 혹독한 고통을 견디고 많은 피를 흘린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수라는 숫자의 우위가 유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통해 사회 시스템은 완벽하진 않지만 많은 보완을 거쳐왔다. 법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능했다. 폭력을 통한 혁명이 정당화되려면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제 사실이 되어야 한다. 영화는 자본가의 권력 지향성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조커의 탄생

 조커가 된 아서는 계급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인가?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관객이 그 대답을 할 수 있다. 그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모든 시스템이 완벽할 수는 없다. 세상의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할 여지가 있는가 혹은 무너졌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조커는 코믹스 속 캐릭터이자 빌런이라는 점이다. 조커의 날개 짓으로 죽음을 맞이한 토마스 웨인이라는 연쇄 반응은 결국 배트맨을 탄생시킨다. 배트맨은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인물이다. 조커와 배트맨의 이런 관계처럼 사람으로 인해 탄생한 사회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이 부딪힌다. 부딪힘은 결국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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