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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빙 사파리 Dec 23. 2021

디자인 체어도 당근이 되나요?

다 된다. 리빙 에디터 고라니 당근 거래 체험기.

달력이 입동을 알리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는 일기예보가 있던 밤, 

나는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비트라의 팬톤 체어를 어깨에 받쳐들고 

길가에 서 있었다. 


길 건너편 카페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야밤에 과년한 총각을 보쌈해 업어가려는 여인처럼 보였다. 

물건을 가지러 오겠다고 한 ‘광화문11’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3분 정도 남았다. 


팬톤 체어는 다리와 좌판을 하나의 재료로 디자인한 최초의 의자다. 

덴마크의 디자인 거장 베르너 팬톤은 이 디자인을 들고 여러 가구 생산업체를 전전했지만 내내 거절당했다. 비트라의 CEO였던 롤프 펠바움이 베르너 팬톤의 작업실에서 이 의자를 발견하고, 엔지니어와 함께 고민을 거듭한 끝에 1968년 양산을 시작하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팬톤 체어는 전 세계적 스테디 셀러이자 지난 한 세기 동안 가장 유명한 디자인 체어가 됐다. 



내가 들고 있던 팬톤 체어는 당대의 것이 아닌, 비트라에서 생산한 2021년 버전. 

좌판이 푹 꺼져서 다이닝 체어나 오피스 체어로 활용하기 불편했던 점을 개선하기 위해 좌판 높이를 3cm 높였고, 100% 리사이클 링이 가능한 내구성 높은 플라스틱 소재를 적용했다. 국내에 입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난 5월 이 의자를 구매했다. 내가 원한 화이트 컬러는 인기 색상이어서, 한 달을 기다려서 마침내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볼수록 집에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한국의 의자보다 좌판이 조금 높고 스케일이 큰 팬톤 체어가 한국적인 층고의 1인 가구를 위한 공간에선 본연의 예쁨을 발휘하지 못했다. 층고 낮은 11평 옛집을 탓하며 아쉽지만 더 작은 가구를 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당근 거래’라는 것을 해볼 때가 된 것이다. “의자를? 쓰던 걸? 45만원에? 누가 사?” 내 얘길 들은 친구들은 돌림노래처럼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가? 당근에 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건가? ‘광화문11’은 내가 판매 글을 올린 지 20분 만에 연락을 해왔다. 만원만 깎아달라는 귀여운 가격 제시와 함께. 만원은 깎아줄 수 있었다. 나는 ‘쿨거래자’니까.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체어 중 하나이자, 21세기용으로 적응을 마친 팬톤 체어를 어깨에 짊어진 내가 길거리에 서 있게 됐다. 



커다란 외제차 한 대가 내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굉장히 맘씨 좋고 공손해 보이는 슈트 차림의 또래 남자가 내렸다. 

“당근… 맞으시죠?” 그는 내 어깨 위 팬톤 체어를 보고 감격해하는 눈치였다. 빠르게 거래를 성사하고 뒤돌아서려는 내게 그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팬톤 체어 어떻게 쓰셨어요? 다이닝 체어? 오브제?” 팬톤 체어를 오브제로 두어도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라면 내 의자가 좋은 곳으로 가려니 했다. 다이닝 체어 겸 오피스 체어로 얌전히 썼고, 집에 더 잘 어울리는 가구를 사려 한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아주 발랄한 목소리로 “그러셨구나! 거래 고맙습니다. 정말 예쁘게 잘 쓸게요!”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아름다운 의자를 보내는 마음이 허했지만 동시에 필요한 곳으로 갔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당근마켓에서 내 온도가 36.8°C 로 올랐으니 상대방도 만족스러웠단 뜻일 거다. 


내가 살고 있는 용산구 기준 ‘빈티지 가구’, ‘디자인 가구’만 검색해도 맵시 좋고 멋진 브랜드의 제품들이 수두룩하다. 가격은 다른 당근 물품에 비해 고가일지 모르나, 서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끼리 사고팔며 중고 디자인 가구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잘 썼던 가구라면 나 역시 잘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새로 집에 들일 가구를 알아보기 위해 매일 당근 서칭을 잊지 않는다. 정말 좋은 가격에 훌륭한 디자인 가구가 올라왔을 때, 타짜처럼 눈보다 빠른 손으로 채팅 거래를 누를 예정이다.


ⓦ Editor. 후암동 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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