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브리짓이 흰색 샤워 가운을 입고 빨강 패브릭 커버 일기장에 만년필로 내년 계획을 작성한다. 술 끊기, 멀쩡한 남자 만나기, 운동하기, 담배 끊기 등 시시한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로 브리짓의 예쁜 필체와 빨강 일기장. 영화관을 나오며 마크 다시처럼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다가 아닌, 브리짓처럼 예쁘게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여대생은 매달 기록물을 남기는 월간지 에디터가 됐고, 예쁘고 정리가 잘되는 다이어리를 찾아 나서는 모험도 함께 시작했다.
다꾸 장인이 되고 싶어
브리짓을 알게 된 지 20년. 수많은 다이어리가 나를 거쳐갔지만 제대로 쓰임을 받은 건 몇 권 되지 않는다. 구입하는 순간만큼은 그 다이어리로 인해 미래가 굉장히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 같고 중요한 일들도 많이 일어날 것 같지만…. ‘작심 한 달’이랄까? 한 달 정도만 지나면 그 의욕은 이상하리만치 사라져버렸다. 다이어리에 적힌 글씨체가 맘에 안 들어서 도무지 뭘 써도 흥이 오르지 않고, 뒤죽박죽 머릿속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법을 좀처럼 터득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매일 다이어리를 들여다볼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 피카소와 헤밍웨이에게 사랑받았다는 다이어리부터 성공한 기업인들의 시간 관리를 책임졌다는 플래너, 작성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는 가계부까지, 다양한 기록 용품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이 세상은 빠르게 변해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변화의 흐름에 동참해 이런저런 기록 앱을 다운받아 사용해봤지만 그마저도 마음처럼 잘 써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이어리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어서, 최근엔 장인정신으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이들의 SNS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피드 속 완벽한 기록물들을 감상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며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을 마음속으로 외치는 사이, 2022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내년에도 쓰다가 방치된 다이어리를 버리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다이어리 장인들을 만나고 유튜버들의 ‘다꾸’ 노하우와 기록 잘하는 법에 관한 영상을 섭렵하며 나만의 전략을 세웠다.
남들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걸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가는 망한다. 남의 것을 따라 해서 잘할 거였으면 이미 20년 전에 다꾸 장인이 되고도 남았다.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키퍼(@analogue_keeper)의 대표이자 《나의 문구 여행기》 저자인 문경연 씨가 작성한 다이어리는 굉장히 체계적이고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범접할 수 없는 ‘넘사벽’의 내공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조언은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그저 쓰기 시작하는 것. 그래야 나의 스타일을 알고, 어떻게든 한 장을 채워서 성취감을 느껴야 다음 장으로도 넘어갈 수 있다고.
이번에 만난 다이어리 장인들(아날로그키퍼의 문경연 대표, 올라이트의 이효은 대표) 모두 여러 권의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여러 권을 돌려 쓰는 게 더 골치 아플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게 사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훨씬 효율적이다. 먼슬리, 위클리, 데일리, 일반 메모 등 여러 파트로 되어 있는 다이어리에 나의 모든 스케줄과 노트를 적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일반 메모 부분만 빨리 채워지거나 위클리는 거의 쓰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자신의 업무와 정리 스타일을 미리 고민해보고 필요한 것들로 다이어리를 구성하면 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월간지 마감, 세 아이 케어, 끝이 보이지 않는 다이어트, 쓸모없는 모임 등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나에게는 대략 4권의 다이어리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장기적인 스케줄을 관리하는 메인 다이어리와 매일의 아이디어와 업무를 자유롭게 적어두는 서브 다이어리를 늘 소지하고, 한 달에 한 번 참여하는 독서 클럽에서 읽은 책 후기를 기록하는 필사 노트 한 권과 일기장, 이렇게 4권으로 2022년을 시작한다면 완벽할 것 같다.
올라이트의 이효은 대표(@all_writer)는 기록하는 방식도 틀을 벗어나면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가로줄이 있는 노트라도 옆으로 놓고 선을 역행해 글자를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나름의 재미있는 미감이 보인다는 것. 실제로 그녀가 매일 그런 방식으로 기록하는 일기장을 보여줬는데, 디자이너의 계획된 작품 같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오롤리데이 박신후 대표의 다이어리 꾸미기 동영상도 흥미롭게 봤는데, 꾸미기에 자신이 없다면 스티커를 활용하거나 심플한 일러스트를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나 역시 그녀가 사용하는 스티커만 있다면 좀 더 신박하게 다이어리를 꾸밀 수 있을 것은 기분이 들었다. 문경연 대표는 일주일을 시작할 때 그 주에 사용할 형광펜 색을 고심해서 고르고 어울리는 조합을 찾아내며 즐거움을 느낀다는데, 형광펜 색 조합은 나도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겠다.
연말에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고르고 고르다가
예쁜 것은 다 품절된 후 가장 무난한 걸로 사는 사람,
문방구라도 하나 차릴 것처럼 온갖 필기구류를 구입해놓고 아껴 쓰다
종국에는 판촉물 펜을 들고 다니는 사람.
초반만 열심히 쓰다가 방치된 노트가 책상 한구석에 쌓여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2022년은 좀 다를 것 같다.
ⓦ Editor. 다이어터 코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