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리밍 저, 마누스, 2024.07.22》
“너 되게 현대 소설 속 주인공 같은 느낌이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서로의 근황을 묻던 중 꺼낸 한마디에 나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친구가 이어서 말했다.
“딱히 부족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할 것도 없는, 아무런 색깔이 느껴지지 않는 그레이한 사람의 모습이랄까?”
그런 말을 하는 친구에게선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서다.
그 당시의 나는 재밌는 게 통 없었다.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도 별로 없었다. 부족한 건 없지만 충만히 채워진 인생을 산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당시엔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서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난리였다. 실제로 내 눈앞에 있던 그 친구도 며칠 뒤 방콕으로 여행을 갈 거라고 들떠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는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3년여 만의 해외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부럽지도, 나도 어딘가 여행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내겐 더 이상 해외는 생각만 해도 설레고 들뜨는 낯선 여행지의 느낌보다는, 낯설고 어색하지만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활 터전의 느낌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렴풋하게나마 당시의 내 마음을 이해하는 중이다.
나는 현재 일본에 살고 있다. 일본 회사에 입사하게 된 남편을 따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낯선 나라에서 산지 올해로 벌써 6년 차다.
처음엔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신나고 들떴지만 그것도 잠시.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들떴던 마음은 점차 가라앉았고, 낯설지만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던 풍경들에도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리밍 작가님의 에세이,《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너무나 익숙하고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 일본의 풍경에 새삼 재미를 느끼게 됐다.
리밍 님은 2018년부터 일본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계기는 남편의 이직으로 어찌 보면 나와 비슷한 이유였지만 그 과정은 조금 달랐다.
결혼 후 신혼생활을 아예 일본에서 시작한 나와는 달리 리밍 님은 한국에 집도 차도 다 있는 상태에서 일본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아예 빈손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무언가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이걸 놓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밍 님 내외는 한국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본에 오는 것을 택했다.
오랜 고민과 여러 현실적인 난관(한국 집의 매매와 산 지 1년도 안 된 가전과 가구의 처분 등)을 거쳐 일본에 오게 된 리밍 님은 때로는 여행을 하는 것처럼, 때로는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산다.
늘 가는 산책길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골목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새롭게 이사 온 도시에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아지트로 삼기도 한다. 표지에도 나온 빨간 중절모를 멋지게 쓴 고양이를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창문이 없는 일본 집의 베란다를 보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다 담으면 한 망에 300엔에 가져갈 수 있는 귤을 보고 재밌어하며 때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선입견에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리밍 님은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눈에 담고 일본에 살며 겪는 모든 일들에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리밍 님은 이 책을 통해 해외 생활에 관한 정보는 아마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일본의 ‘오카와리 문화’ 라든가 ‘4월 1일의 의미’와 같은 일본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소소한 상식들이 책에 담겨 있지만, 전체적인 책의 분량으로 봤을 때 그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실려있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것들.
이른 아침 골목에 퍼지는 커피 향기, 갓 구워진 식빵이 뿜어내는 열기, 그 안에서 조용히 식사하시는 어르신들, 비 오는 날 운전자를 대신해 차고 문을 닫아주던 세탁소 할머니, 지나가는 고양이, 한국에서 온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던 사람들.
- 170p, 《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모습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따뜻한 애정을 담아 바라본 리밍 님의 마음이 책에 고스란히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 뒤. 우리 집 베란다에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예전 같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갔을 그 순간을 그대로 지나치기 싫어서 후다닥 사진을 찍었다. 사막처럼 메말라있던 내 마음이 이 책을 읽고 난 뒤 조금쯤은 말랑해졌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요즘 통 재밌는 것도 없고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에게 리밍 님의 에세이《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를 권하고 싶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낯설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졌던 당신의 일상이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질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