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요람 아테네, 일주일 동안 요트에서 생활하며 섬 항해하기
그리스 요트 여행을 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 살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미국인 커플이 있다.
그들은 매번 여러 사람들을 모아 세계여행을 틈틈이 떠나곤 했다.
이미 가본 국가가 200개가 넘은 뒤로는 한번 가본 곳들도 재방문하는 중이다.
나 또한 그들과 그의 친구들을 따라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한 번은 북유럽, 한 번은 일본으로.
그런 그들이 내가 세계여행을 떠나기 2달 전 친구들을 이끌고 한국에 온다며 연락이 닿았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다시 만난 친구 C는 거부감 없이 산 낙지를 한 입에 삼키며
사장 아주머니께 '감사합니다'라고 미리 외워둔 한국어로 대답했다.
노량진에서 잠깐 만나고 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주 주말에
그들이 제주도에 3박 동안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뭔가에 홀린 듯이 월요일 연차를 내고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본 제주도가 궁금했었다.
함께 차를 렌트하고 통역이 필요하거나 루트를 짤 때 내가 직접 가이드를 하며
미국 친구들에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특별하게 남아있다.
마지막 밤, 함께 흑돼지를 구워 먹으며 이들과 내 퇴사 후 여행 계획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이미 유명 블로거였던 C는 이번에 한 요트 회사에서 협찬을 받아 여름에 그리스를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시기에 이탈리아에 한 달 동안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이 나도 같이 조인할 것을 권유했다.
'The Yacht Week'이라는 요트회사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일주일 동안 요트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의 섬들을 항해하는 일정이다.
아테네 항구에서 출항 후 일주일 동안 섬을 총 4개 (Poros, Dokos, Ermioni, Hydra)를 여행한다.
이 회사는 그리스 말고도 크로아티아, 보라보라, 캐리비안 섬 등의 파라다이스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과 요트에서 생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요트 한 대당 8~10명의 승객 + 선장과 셰프가 함께 탑승하며,
이번 그리스 프로그램엔 총 15대 정도가 모일 거라고 예상한다고 했다
('와... 그럼 총 몇 명이 온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얼른 곱하기를 해보았다).
이 요트들이 늘 함께 이동하는데 일주일 동안 무인도에서의 바베큐 파티,
정박한 섬에서 ATV 체험, 스노클링 등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이 진행하며
배들끼리 묶어놓고 서로의 갑판 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선상 파티가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다.
내가 친구들과 일주일 동안 그리스에서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해볼 기회가 다시 언제 올 수 있을까란
생각에 들을수록 솔깃해졌다.
가격 및 일정 정보를 제대로 숙지한 후 난 과감하게 계획을 바꿨다.
그리고 3달 뒤, 난 발리 한 달 살기를 끝낸 후 싱가포르에서의 레이오버 여행을 거쳐
12시간을 날아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로 향했다.
비행 중간에 기장이 지금 산토리니 섬 위를 지나가고 있으니 창문 밖을 내려다보라고
승객들에게 안내 방송을 한다.
아직 동이 틀 무렵이었던 비행기 왼쪽 창밖은 보라색, 오른쪽은 청록색을 띠고 있었다.
도착 후 그리스식 빵과 요거트로 가볍게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시내에 진입하는데 이글이글하는 태양 아래 온 세상이 모랫빛이다.
유럽에서 가장 더운 도시이자, 녹지대 비율이 가장 적은,
월계관을 쓴 도시 '아테네'에 도착했다.
무엇보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맘마미아와 재키 오의 나라에 왔다.
첫날 묵은 호스텔 이름은 '조르바'.
우연의 일치인지 내가 일정을 마치고 떠날 때 이용한 공항의 이름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이름을 딴
크레타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르바 같이 낭만적이고 자유롭게 보낸 그리스에서의 2주 일정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륙 이동을 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첫날 체크인 하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시차 적응을 못해 새벽에 깨서 무작정 밖으로 나간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구글 맵을 보다가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언덕이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잠이 안 와 심심했던 난 '언덕 위에서 일출이나 볼까?'란 생각으로 가볍게 길을 나섰다.
동트기 전 아테네의 하늘은 아직 연한 보랏빛이고
날씨는 선선했다.
사람들이 사는 가정집 옆에 발굴 중인 유적지의 흔적이 간간이 보였다.
저 멀리서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고,
신전의 밑자락에 올라가서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다.
언덕 위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이게 얼마나 이곳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큰 사치였는지는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이내 천천히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스의 고대 유적지에서 보는 일출은
서구 문명의 요람 그 태초의 시작을 감히 엿보는 기분이었다.
웅장하지만 차분하고 따뜻하다.
천 년의 유적지도, 태양도 오롯이 내 것인 마냥
경이롭게 그 고요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저번 글 '발리 한 달 살기'의 누사 페니다 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이유 때문에 아침잠이 많은 나지만 가끔은 꼭 일찍 일어나 유적지 하나를
전세 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서울에서는 직장 생활할 때 오후 반차를 쓰고
주중 오후, 한적한 창덕궁에서 산책했을 때 비슷한 깊은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선셋과 선라이즈.
태양과 땅이 맞닿는 이 두 가지 순간을 모두 좋아하지만
아침형 인간은 못되어 인생에서 더 많이 즐긴 광경은 후자다 (아니 근데 솔직히 대부분 그렇지 않나?).
노을이 아름다운 도시 미국 LA에 가면 '선셋'이란 단어를 붙인 도로와 상점들이 많다.
선셋 대로, 선셋바 등등.
보통 선셋(일몰)은 누구나 여유만 낸다면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매일 돌아오는 감성적인 이벤트다.
반면 선라이즈(일출)는 다짐과 약간의 의지가 필요한 새 출발에 힘을 실어주는 경험이다.
선셋은 낭만적이고 선라이즈는 희망적이다
영화로 비교하자면 하나는 '라라랜드', 하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이 두 테마를 동시에 다룬 영화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는
태양이 뜨기 전 불타오른 낭만과 태양이 지기 전 다시 피어나는 희망 두 가지를
같은 배우들과 함께 9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다루었다.
일출의 기운을 양껏 흡수하고 나니 이미 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아침 일찍 일어나 가게 오픈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상인들이 보인다.
요거트를 먹고 제대로 아크로폴리스를 보러
오전 8시 오픈 시간에 맞춰 매표소에 갔는데 이미 길게 늘어진 줄…
생각보다 볼거리가 없는 도시라 아테네에 온 관광객들이라면
다 이 언덕에 모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데
맞는 말 같다.
가까이서 본 신전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고대 도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신전은 성당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렇지만 여행사 깃발이 곳곳에서 흔들리는 인파에 9시가 되자마자 36도는 기본으로 찍는 용광로 날씨 때문에
땀을 홍수처럼 흩뿌리며 돌아다니며 정오도 안되어 바로 KO 했다.
구글맵에도 그늘이 적은 관광지는 열사병 위험 때문에 대낮에 방문을 자제하라는 권고 문구가 뜰 정도이니,
아테네에 방문 계획이 있다면 나처럼 해 뜰 무렵 혹은 해 질 녘에 후딱 산책을 마치는 걸 추천한다!
비포 선셋, 선라이즈가 아닌 비포, 애프터 용광로를 기억하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아테네는 과연 그늘과 녹지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먼지와 모래색으로 가득 차 뭔가 이집트 바이브도 있다.
그리고 빛바랜 내가 좋아하는 빛바랜 올리브 나무들이 건물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다.
파르테논과 아크로폴리스 한 바퀴 다 돌고 곳곳에 꽃이 있는 예쁜 '플라카 광장'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 병을 마시며 요트에서 입을 토가(그리스 전통 의상. 토가 테마를 한 선상 파티를 연다고 했다)와
선크림을 빈티지 샵에서 구입했다.
이탈리아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로 유럽은 8년 만이다.
아테네는 힘든 경제 상황을 지난 상태라 도시가 전반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보다 낙후되긴 했다.
그러나 너무 그리워했던 유럽이라 다시 이곳에 왔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그저 거리만 거닐어도 좋았다.
할 것 없다는 아테네지만,
밖의 기온은 37도에 육박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게으름을 피워도 마음이 편해서 좋다.
외국인에게 너무 친절하지만은 않은 (반대로 말하면 관광객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로컬 그리스인들도 좋았다.
저녁엔 드디어 요트를 같이 탈 친구들과 시내에서 만나 그리스식 해산물 요리를 먹고
내일 승선 계획을 재확인한 후 헤어졌다.
아테네에서의 짧고 강렬한 하루가 지나간다.
승선하는 날이다.
섬이 많은 나라의 수도인만큼 아테네의 항구는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 우리가 출항하는 알리모스 항구는 수백, 수천 대의 흰 요트들이 늘어진 곳이다.
이 중 우리 요트가 정박해 있는 선착장 번호를 찾는데 땡볕 아래서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진되는 걸 느꼈지만
우리가 일주일 동안 지낼 요트를 보는 순간 그 고생이 다 사라졌다.
내부엔 방과 화장실이 4개 (2인 1실) 그리고 큼직한 주방과 야외 다이닝 테이블이 있었으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계단 틈 사이로 바닷물과 물고기들이 보였다.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낼 8명의 사람들과 (이 중 구면인 친구들은 3명이다)
요트의 선장, 셰프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밤은 이 항구에 정박한 상태로 밤을 보낼 예정이다.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해를 보며 요트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다른 요트에 배정된 C는 앞으로 일주일간 매일 축제의 밤이 열릴 테니 오늘 미리 푹 자두라는 조언을 주었다.
아침에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선장 E가 요트를 재정비하고 출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주방으로 올라오니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있다.
셰프 F 또한 일찍 기상해 우리 8명을 위한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요트 밖으로 나가 선장이 세일링 하는 모습과 점점 멀어지는 아테네의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우리와 함께 할 다른 15척의 배들도 같이 에게해를 향해 돛을 펴고 나아가고 있다.
요트 선장(skipper)이란 직업은 낭만적이다.
시칠리아에서 온 선장 E는 자율주행차량을 운전하는 것 마냥 요트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속도에 도달하자
선글라스를 끼고 손은 운전대 위를 까딱까딱하면서 선배스를 하듯이 햇빛을 즐기며 늘어져 있다.
요트 셰프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두세 살 어린 F는 벨기에 출신으로 매번 다른 나라의 요트 프로그램에 합류해
승객들과 함께 묵으면서 요리를 하는 게 그녀의 직업이다.
2주 전에는 크로아티아에서 일주일 동안 항해를 했다고 했다.
요리와 여행을 너무 사랑하는 그녀는 이번 휴가를 태국으로 가는데
거기서도 쿠킹 클래스를 들으며 새로운 레시피를 배워올 예정이라고 한다.
'요트' 구조의 디테일과 디자인은 '캠핑카'와 '비행기 비즈니스석'의 그것과 많은 것을 공유한다. 맞닿아 있다.
이들 모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의 효율과 럭셔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어떻게 좁은 공간과 디테일에서 고객의 편의를 극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지독하게 세심한 배려와 인사이트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효율'과 '럭셔리'라는 두 단어는 멀리 있는 듯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늘 함께 해 왔다.
샤워할 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 뷰가 명화처럼 평화롭고 좋았다.
중간에 요트를 바다 한가운데 세워두고
스노클링과 수영을 했다!
물 위에서의 첫 번째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이 탁 트인 바다 위로 풍덩 뛰어든다.
수영을 마치고 올라오니 셰프가 준비한 점심이 테이블에 가득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일주일간 셰프 F가 해준 음식들은 너무 아테네의 일출만큼이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F는 매일매일 그리스식, 지중해식, 포케, 브런치, 비건 등 장르를 바꿔가며
우리의 입맛을 어린아이마냥 길들였다.
이튿날 3시간 동안의 항해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바다 한가운데
사로닉 제도(Saronic Islands)라고 불리는 곳에 정박했다.
그런 다음 요트 15대를 두 줄로 연결해 중간에 수영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요트들로 건너갈 수 있는 '터널'을 만들었다.
가운데에 물에 뜨는 '댄스 플로어'가 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노을을 보며 갑판 위에서 저녁 만찬을 먹었다.
고요한 물길을 따라 달빛이 조용히 흘러내린다.
아테네에서 보았던 강렬하게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반대로
달은 뜨고 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하늘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조용히 태양의 빛에 가려져 사라진다.
와인에 비유하자면 은은하고 섬세하게 잘 빚은 피노누아 같다.
나는 일주일 동안의 요트 여행이 끝난 후 다른 섬들을 몇 군데 여행할 계획이 있었는데,
같이 요트를 탄 친구 중 두 명이 해당 섬들에 관심을 가져해 같이 갈 계획을 세우며 밤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첫 번째 섬이자 활기찬 해변으로 유명한 포로스(Poros)에 도착했다.
바다에서 24시간 이상을 보낸 후 처음으로 육지에 발을 내딛는다.
이곳에서 ATV를 타고 섬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섬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경치를 봤는데,
지중해의 바다는 코발트빛으로 선명하고 육지는 아테네처럼 흐릿하다.
산 위의 작은 수도원과 포세이돈 보호구역의 고고학 유적도 구경했다.
다음 행선지인 러브 베이 해변에선 사람들이 비치 발리볼과 림보 콘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해 질 녘까지 있다가 요트 멤버들과 함께 포로스의 유명한 골목길 노천 레스토랑 중 하나로 안내받아
금빛으로 물든 섬을 보며 현지 해산물 음식을 먹었다.
이 골목엔 레스토랑과 칵테일바 그리고 좋은 저녁 공기가 끝없이 이어져있다.
길거리엔 뉴욕의 스튜디오 54를 연상시키는 디스코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밤이 되자 도시 전체가 스팽글을 박아 놓은 냥 반짝인다.
별똥별과 플랑크톤들이 하늘에 아른거렸다.
다음날도 열심히 항해를 한 후 도착한 곳은...
18명의 정교회 수도사와 양치기들만 사는 도코스의 만에 정박해 수상택시를 타고
건너편의 무인도 해변으로 넘어가 바베큐 파티를 하고 물수제비를 던졌다.
이곳이 오늘 저녁 우리들의 프라이빗 해변이다.
다음날 도착한 곳은 에르미오니 (Ermioni).
지중해의 바다 뷰와 요트 생활도 살짝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또 바다 위에 정박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육지에 더 일찍 정박하기로 결정했다. 오늘도 자연이 이긴다.
에르미오니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스튜디오의 무료 요가 수업에 가 오랜만에 수영이 아닌 다른 운동을 한 후,
포세이돈 테마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향한 섬은 히드라(Hydra) 섬이다.
이곳에 없는 것 하나, 바로 자동차.
온전히 당나귀들로만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동화 속에서만 볼 것 같은 섬이 그리스에 있었다.
이곳의 뒷골목을 배회하고, 당나귀를 쓰다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산책을 했다.
그리스 퓨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리넨과 액세서리 쇼핑을 좀 하다가 다시 요트로 돌아갔다.
내일이 아테네 항구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인만큼
행복하게 바위변 해변 바 옆에서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다.
발 밑의 모래와 소금기가 묻은 머리카락이 태양의 기운을 흠뻑 흡수한 피부에 와닿는다.
마지막 밤은 포로스의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지나가고 있다.
길거리 사람들은 셔츠를 풀어헤친 채 양손엔 개봉하지 않은 와인병을 들고 걸어 다닌다.
요트에서의 마지막 아침.
우리의 요트는 아테네를 향해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후에 알리모스 항구로 돌아와 정이 든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대부분 뉴욕 출신이라 이듬해 뉴욕 방문 계획이 있던 나는 뉴욕에서 꼭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9개월 뒤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중 2명과 함께 미코노스와 산토리니에 들렀다 C 커플과 다른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크레타에서 재회할 계획이었다. 크레타 멤버들과는 며칠 뒤에 만날 걸 약속하고 포옹했다.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다르고 재밌는 하루를 살았던 만큼
나중에 이때를 매우 아름답고 기묘한 시간으로 돌이켜보며 기억할 것이다.
배 위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늘 궁금했었는데,
매일 아침이면 새로운 섬 또는 바다 위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배 밖으로 뛰어내려 수영하던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말이다.
매일 셰프가 해주던 건강하고 다양한 그리스/지중해 음식 또한 그리울 경험이다.
다음 항구로 향하는 택시에 가만히 앉아 단 하루 사이 익숙해진 아테네의 풍경을 본다.
나의 여름 한 순간이 이제 다른 섬에서 펼쳐질 참이다.
그동안 우리가 지냈던 배와는 사뭇 다른 대형 여객선을 타고 도착한 미코노스에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