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만큼이나 런웨이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
매해 2월과 9월은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설레는 기간이다.
4개의 도시-뉴욕, 런던, 밀라노 프랑스에서 열리는 패션위크.
유서 깊은 명품 브랜드들과 신진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선보이는 컬렉션에는 매 시즌 다양한 옷들과 액세서리들이 등장해 역동적으로 새로운 유행을 창조해낸다.
그런데 장난기 많고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번뜩이는 디자이너들은 의상뿐만 아니라 배경음악, 메이크업, 워킹, 연출, 무대 장치에도 그들의 색채와 유머를 가미해 관객들을 맞이하는데 이런 소소한 디테일에 눈과 귀를 기울이면 패션쇼는 더욱 환상적인 종합 예술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 디자인일 것이다.
기나긴 패션의 역사 동안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발전해온 런웨이 무대.
이 중에서 정말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의 무대 세팅을 몇 개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이 리스트는 계속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1. 알렉산더 맥퀸의 체스판
패션계에서 짧지만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예술혼을 불태우고 연기처럼 사라진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그의 천재성은 의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05년에 발표한 “It’s Only A Game” 컬렉션. 그는 런웨이 현장을 거대한 체스판으로 구현했고 그 안을 체스의 말이 된 모델들로 채웠다. 한 칸 한 칸 게임의 룰대로 움직이는 모델들의 모습은 한 판의 잘 구성된 체스 게임을 보는 듯했다.
2. 펜디와 로마의 트레비 분수
가장 이태리 적인 브랜드 중 하나인 펜디(Fendi)가 유서 깊은 이태리 도시 로마를 2016년 행선지로 택한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한밤중 트레비 분수에 쏟아져 나오는 물 위를 걸어나오는 모습을 상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수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과 고요한 밤을 밝히는 환상적인 조명 아래 펼쳐진 이 런웨이는 연일 화제가 되었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푹 빠지게 할 퍼포먼스.
3. 길거리에 내앉은 마크 제이콥스
90년대 그런지룩의 유행을 이끈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뉴욕 토박이인 그는 2017년 자신이 늘상 걸어 다니는 이 뉴욕의 오픈된 거리를 런웨이로 만들었다.
파크 애비뉴를 따라 자연스럽게 거니는 모델들은 무심한 듯 시크한 뉴요커 그 자체였고 복고적인 스트릿 패션은 그런지룩의 환생을 보는 듯했다.
4. 루이비통과 회전목마
많은 명품 브랜드들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캠페인과 광고, 런웨이에서 표현하고자 한다. 2011년 루이비통이 설치한 이 거대한 새하얀 회전목마 세트장과 놀이 기구를 즐기는 모델들의 모습은 동화적인 감수성을 자극했다.
5. 샤넬과 슈퍼마켓
고급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상들을 걸치고 각종 식료품들이 전시된 큰 마트 사이사이에서 먹을거리를 주워 담는 모델들. 2014년 샤넬 컬렉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슈퍼에 간식을 사러 나갈 때도 우아함과 스타일을 잃지 말아라'가 아니었을까?
6. 루이비통과 리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브라질의 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한켠에 자리한 퓨처리스틱한 건축양식의 현대미술관. 꼭대기에서부터 이어진 구불구불하고 기다란 길을 따라 내려오는 모델들은 마치 새로운 행성에서 지구로 행진하는 듯했다. 관객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높은 지점에서 시작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이 루트는 관객들에게 기대감을 선사했다.
7. 에르메스와 마구간
마구 용품을 제작하며 시작된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es). 그들의 탄생 취지에 맞게 2010년에는 아예 마구간에서 그들의 컬렉션을 발표했다 (천장은 샹들리에로 장식해 기품 있게 연출했다). 승마복을 갖춰 입은 채 말에서 내려 채찍을 들고 워킹하는 모델의 자태를 보아라.
8. 토미 힐피거가 구현한 사막 속 오아시스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춥고 메마른 도시 생활에 지친 자신을 위해 호수가 있는 열대 섬을 뉴욕 한복판에 제작한다. 한편에는 모래사장과 야외 바가 있는 이곳에 지지 하디드 등의 탑모델들이 함께 호수를 가로질러 첨벙거리며 워킹했다.
9. 제시카 민 안의 센 강 크루즈
베트남 출신의 디자이너 제시카 민 안(Jessica Minh Ahn)은 센 강을 항해하는 유람선으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수 십 개의 다리 밑을 지나면서 스쳐 지나가는 파리의 풍경과 그녀의 감각적인 쿠튀르 의상들에 취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10. 헨릭 빕스코프의 햄스터 쳇바퀴
덴마크 출신 패션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프는 2009년 코펜하겐 패션위크 때 대담한 상상력을 펼쳤다.
귀여운 펫 햄스터와 런웨이의 결합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이 컬렉션의 모델들은 제자리에 서서 쳇바퀴 워킹을 선보였다.
11. 레고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개구리들로 뒤덮인 충격적인 의상을 입고 등장한 레이디 가가를 기억한 적이 있는가? 그녀의 의상을 디자인한 모로코 출신 디자이너 장 샤를르 드 카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이 2008년에 선보인 컬렉션에는 모델과 관객, 무대라는 전형적인 3요소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모든 것이 레고로 연출된 이 컬렉션은 역사상 가장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무대임에 틀림없다.
12. 톰 브라운이 재현한 세계 대공황
환상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패션위크이지만 패션쇼가 항상 밝은 분위기여야 한다는 법도 없다.
2016년 톰 브라운이 선보인 컬렉션은 우울하고 어두웠던 대공황 시절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그대로 재현했다. 메마른 나뭇가지들과 차가운 느낌의 시계탑이 오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의 칼처럼 재단된 샤프한 수트들이 더 돋보였던 이유도 이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