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타운의 하위 문화와 업타운의 럭셔리를 혼합한 뉴욕의 스타 디자이너
한국에서도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 (Marc Jacobs).
1984년 런칭 이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이 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동명의 디자이너와 동업자 로버트 더피 (Robert Duffy)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 브랜드의 성장 배경에는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스타성과 유명세가 큰 몫을 했는데,
그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그는 ‘페리 엘리스상’의 최연소 수상자이며 이후에도 상을 7 차례 더 수상하며
패션계의 오스카 상이라고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 상 후보에
역사상 가장 많이 오른 디자이너이다.
뉴욕의 패션스쿨 파슨스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교내 각종 상을 휩쓸었고,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16년 동안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틀에 박히지 않은 통통 튀고 경쾌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그의 자유로운 자아와 많이 맞닿아있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조건 유행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하나인 그의 생애와 예술관에 대해 살펴보자.
마크 제이콥스는 1963년 뉴욕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3번의 재혼을 통해 자주 이사를 다녔던 그의 어린 시절은 불안정했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눈을 떠 13세의 나이에 당시 뉴욕에서 가장 유명했던 샤리바리라는 의류 매장에 찾아가 무급이어도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는데 2년 후부터 이곳에서 옷을 정리하는 알바를 시작한다. 그러다 평소에 존경하던 디자이너 페리 엘리스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고 그는 마크에게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면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뉴욕의 유명 디스코 클럽들을 드나들며 7-8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또한 에이전시의 사장이었던 삼촌의 도움으로 뮤지션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블론디, 롤링스톤즈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과 그들의 패션 스타일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차지한다.
마크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은 바로 그의 친할머니.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다.'라고 밝혔는데
17살 때부터 그런 어머니를 떠나 친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뉴욕의 부유한 동네인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버그도프 굿맨, 삭스 피프스 에비뉴 같은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던 세련된 멋쟁이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니트 짜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고 영감을 주는 존재였고 그의 인생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교 졸업 후 페리 엘리스의 권유대로 명문 패션 스쿨 파슨스에 입학했는데
재학 시절부터 '올해의 학생상'과 졸업상 등 여러 상을 휩쓸며 재능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할머니가 직접 떠준 옵 아트 문양의 발랄한 스웨터 3벌을 졸업작품으로 디자인했고,
이를 유년시절 일했던 샤리바리의 주인이 주문해 판매하였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훗날 동업자로 함께 브랜드를 시작하게 될 로버트 더피.
그는 그가 다니던 의류 회사 루번 토마스에서
새롭게 런칭된 스케치북이라는 브랜드의 디자인을 마크에게 맡겼다.
마크는 폴카 도트가 새겨진 오버 사이즈 스웨터를 선보였는데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를 두고 ‘60년대의 활력에 우아함을 더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루번 토마스는 폐점을 하는데.....
1984년, 일자리를 잃은 더피와 마크는 ‘제이콥스 더피 디자인 주식회사’라는 패션회사를 설립,
그로부터 2년 후 드디어 마크는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첫 컬렉션을 발표하는데
마크 제이콥스라는 브랜드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초창기부터 보그지가 ‘패션계의 7인의 떠오르는 별’ 중 한 명으로 그를 소개하는 등 주목을 받지만
투자사들의 부도, 제품 도난, 화재, 심지어 세관에 패션쇼 작품들이 묶여 쇼가 취소되는 등
순탄치 않은 행보를 걷는다.
하지만 1987년 마크는 개성 있는 디자인을 인정받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어워드인 CFDA의 ‘페리 엘리스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당시 23세)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1989년, 마크와 더피는 '페리 엘리스'에 각각 부사장 및 사장으로 발탁되어 한때 뉴욕의 대표적인 브랜드였지만 디자이너의 사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페리 엘리스를 4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연매출 1억 달러가 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때 나이는 25세.
1990년 어느 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역사적인 순간에 마크 역시 베를린의 한 바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선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그 노래는 바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그 자리에서 영감을 받은 마크는 뉴욕으로 돌아와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의 한 중고샵에서 2달러를 주고 산 낡은 플라넬 셔츠를
이태리의 공장으로 보내며 이런 요청을 한다.
한 마에 300달러가 넘는 고급스러운 실크로 이런 체크무늬 셔츠를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탄생한 게 1990년 초 패션계를 강타한 그 유명한 그런지 룩.
너바나와 펄 잼 같은 시애틀 록 밴드의 반항적인 음악과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구겨지고 낡은 체크 셔츠, 찢어진 청바지, 고급스러운 소재의 컨버스나 버켄스탁 등을 선보인 파격적인 컬렉션으로 마크는 다시 한번 CFDA의 ‘올해 최고의 여성복 디자이너상’을 수상한다.
그런지 룩은 언더그라운드 밴드 특유의 어둡고 지저분한 면들을 그대로 반영하며
어울리지 않는 낡은 옷들을 자유롭게 섞어 입는 형식이었는데(의도된 미스매치),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젊은 세대들의 유니폼’으로 자리 잡고
1990년대의 주요한 패션 현상이 되었다.
하지만, 에디터들과 대중의 호응과는 반대로 보수적인 상류층 고객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으며
경영진 역시 ‘그 누구도 수천 달러의 돈을 주고 구겨진 체크 셔츠를 사려하지 않을 것’이라며
생산을 취소하고 마크와 더피를 해고한다.
하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후 픽사를 설립한 스티브 잡스처럼
페리 엘리스에서의 해고는 곧 ‘마크 제이콥스’라는 브랜드가 폭풍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해고된 직후 마크와 더피는 디자인 회사 ‘마크 제이콥스 인터내셔널’을 창립해
8년 만에 다시 ‘마크 제이콥스’라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1997년, 뉴욕 소호에 첫 매장을 열며 해외시장으로도 사업을 확대하던 어느 날,
마크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바로 권위 있는 브랜드 루이 뷔통이 이들에게 손을 내민 것!
루이 뷔통을 소유한 기업 LVMH의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는 마크에게 액세서리 라인은 물론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복과 남성복 라인을 런칭하는 임무를 맡겼고,
마크 제이콥스 브랜드 지분을 일부 인수해 그가 재정적 고민 없이 디자인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젊고 반항적인 마크가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인 루이 뷔통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기존의 구식 이미지를 탈피한 혁신적인 디자인을 통해 수많은 히트 아이템을 탄생시키며
이런 걱정을 단숨에 불식시켰다.
마크는 대중문화를 하이엔드 패션과 절묘하게 믹스시키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는데,
락 음악과 다운타운의 하위문화를 '그런지'라는 세련된 하이패션으로 승화시킨 것처럼,
점잖은 루이 뷔통을 팝아트와 결합시켜 브랜드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쇄신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루이 뷔통은 점점 중년들만 이용하는 보수적이고 고루한 이미지로 고전하고 있었는데,
마크가 등장하면서 전 세계의 젊은 여성들이 그가 새롭게 탄생시킨 루이 뷔통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기록적인 매출 증가를 달성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재미있기를 원했다.
마크는 루이비통을 상징하는 전통 문양인 ‘모노그램 캔버스(다이아몬드, 별, 꽃, LV 로고로 구성된 패턴)’에 젊고 생기 있는 감각을 입힌 아이템들을 주로 선보였는데,
반짝이고 통통 튀는 컬러의 에나멜가죽에 로고를 박은 ‘베르니(‘윤이 나는’이라는 뜻)’가 대표적이다.
모노그램을 프린트한 데님 원단으로 만든 핸드백도 발표하였다.
또한 마크는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과 콜라보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는데
이를 통해 일반 대중은 친근하게 현대 미술에게 다가갈 수 있고,
같이 협업한 아티스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2001년에는 현대 예술가 스티븐 스프라우스와 함께 모노그램 위에 형광 페인트로 로고를 휘갈겨 쓴 ‘그래피티 모노그램’ 시리즈를 발표하며 트렌디한 2,30 대 젊은 고객층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2008년에는 현대 미술가 리차드 프린스의 ‘농담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얻은 ‘모노그램 조크’ 핸드백 라인을 선보였다. 리차드 프린스의 작품에 줄곧 등장하는 간호사들이 시가 적혀있고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린 가방을 들고 런웨이에 섰다.
스티븐 스프라우스와 작업한 그래피티 모노그램 시리즈와 리처드 프린스와 진행한 '농담 시리즈'에 등장한 간호사들.
특히 2003년에 “아시아의 앤디 워홀”라 불리는 무라카미 타카시와 함께 발표한
36개의 캔디 컬러의 로고로 채운 ‘멀티 컬러 모노그램’과
벚꽃 프린트를 박은 ‘체리 블로섬 모노그램’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마크와 타카시의 재기 발랄하고 유쾌한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를 통해 무려 3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핸드백이 옷보다 더욱 주목받게 되는 ‘핸드백 신드롬’을 가져왔다.
2012년에는 일본의 아방가르드한 예술가 야요이 쿠사마와 함께 그녀 특유의 물방울무늬가 가득한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한 작업물들은 핸드백을 패션 아이템이 아닌
하나의 아방가르드한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루이 뷔통의 매출이 그의 영입 전보다 무려 4배나 올라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은
패션계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이 외에도 흑인 래퍼 칸예 웨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스니커즈를 선보이거나
모노그램 로고를 입힌 애견 캐리어를 선보이기도 하며
끊임없이 루이 뷔통에 젊고 생기 있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2013년 루이비통을 떠날 때까지,
파리에서는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로, 뉴욕에서는 마크 제이콥스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로
각각의 컬렉션을 바쁘게 진두지휘하며 전 세계 패션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제 그의 고유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려고 한다.
2000년, 마크는 가방 및 액세서리 라인을 런칭하고
이듬해 세컨 라인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를 선보여 젊은 소비자들을 공략했는데
판매 일주일 만에 아이템이 모두 품절되었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 마크는 ‘올해 최고의 여성복 디자이너’, ‘올해 최고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올해 최고의 남성복 디자이너’등 CFDA에서 주는 상을 7 차례 더 수상하였으며 2007년에는 아이웨어와 아동복 라인, 데이지 향수를 모두 성공적으로 런칭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마크 제이콥스는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하는 아이템을 정확하게 만들어 낸다는 평을 받는데,
미국의 소설가 프랜신 프로즈는 마크 제이콥스 신드롬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두가 마크에게 홀린 것 같다.
뭐든지 마크 제이콥스와 연관이 되면 갑자기 인기를 끈다.”
이제부터 대중을 사로잡은 그의 브랜드 특징과 히트상품들을 찬찬히 살펴보자.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재미없는 요소를 뽑아내 화려한 것으로 탈바꿈시키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속물적인 반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컬러는 어떤 것보다도 거대하다.
마크 제이콥스의 의상은 톡톡 튀는 컬러 배합과 경쾌한 프린트, 젊음의 에너지와 위트가 특징이면서
과하지 않게 실용적이고 웨어러블해 독창성과 상업적 가치를 두루 가졌다.
그의 옷은 다운타운의 힙한 언더 바에서부터 업타운의 고급스러운 사교 파티장까지 언제 어디에나 어울렸는데 이런 넓은 디자인 스펙트럼으로 상류층과 캐주얼웨어의 중간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도시적이면서도 환상을 품은 그의 작품들은 뉴욕 토종이면서 보헤미안적 감성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그의 인생을 닮아있다.
자아도취에 빠져 그저 예쁘기만 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들과 달리
‘한 소녀가 입고 싶어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며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들을 30년 넘게 만들어내고 있다.
벼룩시장, 재활용품, 오래된 패션 사진, 현대 미술, 거리 패션, 1970년대 뮤지션 등의
문화에서 얻는 영감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그의 디자인은
단순한 옷과 액세서리를 넘어 하나의 스토리텔링과 문화가 되고 있으며 팬들은 그의 옷을 구매하며 마크의 문화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마크는 특히 빈티지 아이템을 사랑하는데,
복고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레트로 패션에 젊음과 위트라는 특유의 미학을 얹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특히 그가 10대를 보낸 1970,80 년대의 글래머러스하고 펑키한 뉴욕 클럽 의상은
그가 런웨이에 단골로 내보내는 테마인데 저속하고 반항적인 문화를
실크나 모피 같은 소재를 이용해 고급스럽고 편안하게 표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컬렉션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토끼 머리 장식, 회전목마 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아방가르드한 패턴과 대담한 컬러 매치, 1920년대의 클래식한 원단과 60년대의 촌스러운 패턴을 섞는 식의 다양한 시도를 엿볼 수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엄마의 화장품을 몰래 쓰는 소녀, 상류층 숙녀, 중고품 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아티스트 등 컬러와 옷의 종류 뿐만 아니라 런웨이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다양한 유형이 혼재되어 있다.
스트라이프와 도트는 그의 컬렉션에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다.
그는 의상뿐만 아닌 다른 카테고리에서도 무수한 히트상품을 탄생시켰다.
먼저 가방.
그의 핸드백은 실용성과 트렌디함을 동시에 갖춰,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템으로 꼽힌다.
왼쪽부터 런던 하이드 파크의 웰링턴 아치와 기둥에서 영감을 받은 웰링턴 백,
닥터백 형태의 인코니토 백 (Incognito Bag),
모델 제시카 스탐이 뮤즈가 된 스탐 백 (복주머니를 연상시키는 브랜드의 가장 대표적인 백이며 수많은 셀럽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크 제이콥스를 상징하는 더블 제이(J) 로고가 장착된 카메라 백,
자물쇠 장식이 특징인 파라다이스 백,
깔끔한 디자인의 트러블 백,
시계 또한 숫자를 지워버리고 그의 이름을 새기거나 더블 제이 로고로 테를 감싸는 등
대담한 시도를 많이 했다.
다음으론, 마니아들 사이에서 수집 열풍을 불러일으킨 온 향수와 코즈메틱 라인.
특유의 파스텔 톤의 소녀 같은 분위기를 제품 패키지와 광고에 반영한 것이 인기 비결이다.
향수는 주로 소녀의 화장대에서 등장할 것 같은 상큼한 플로럴이나 프루티 계열의 향이 많은데
대표 향수 라인을 소개하겠다.
먼저, 데이지(Daisy) 향수!
플로럴 계열의 여성스러운 향을 지녔는데 말랑한 고무 소재의 꽃잎이 달린 패키지가 인기를 모았다.
마크가 좋아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에게 영감을 받아 제작한 향수이다.
TV 프로 '겟 잇 뷰티' 퍼퓸 부문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해서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오롤라(Oh, LoLa!) 향수.
마크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다코타 패닝이 직접 광고에 등장했는데,
이 광고에서 소녀풍 드레스를 입고 두 다리 사이에 큰 향수병을 놓은 자세가 문제가 되어
영국 광고심의 위원회에서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2012년 출시된 향수 '도트'는 무당벌레를 닮은 보틀 디자인이 특징인데 물방울무늬는 마크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도트 패턴을 즐겨 쓰는 그의 컬렉션과도 잘 연관된다.
그리고 코스메틱 라인의 대표 상품으로는 키스 팝 립스틱(Kiss Pop Lipstick)이 있다.
크레용 모양의 스틱 립스틱으로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귀엽고 위트 있는 디자인이다.
마크 제이콥스의 상품 카테고리는 문구류까지도 그 영역을 넓혀갔는데,
그는 20년의 역사를 지닌 뉴욕의 서점 ‘바이오그래피 북숍’을 인수해 2010년 북마크(Bookmarc) 서점을 오픈했다. 하이 패션 브랜드와 저렴한 문구류와의 만남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독특한 행보였는데, 이 곳에는 그가 즐겨 읽는 고전 소설부터 다양한 사진집과 잡지, 노트, 책갈피, 연필 등의 문구류를 판매한다. 합리적인 가격의 아기자기한 문구류와 감각적인 서적들로 가득 찬 북마크는 뉴욕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다.
마크 제이콥스는 스트리트 매장에도 그만의 자유분방한 브랜드 철학을 담으려 했다.
그는 기존 명품 브랜드와는 달리 '캐주얼의 명품화'를 이뤄냈다는 그의 업적은
백화점 매장에 입점하기보다는 스트리트 매장에 더욱 공을 들이는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뉴욕에 첫 번째 스토어를 연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두 번째 매장을 오픈한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캘리포니아에서 LA부터 매장을 여는데 반해
마크는 ‘자신의 브랜드는 화려함이 아닌 신비한 이미지가 주 콘셉트이기 때문에
화려한 LA에 보다 히피, 동성애 문화 등 다양한 문화의 산지인 샌프란시스코가 더욱 적합하다’며
샌프란시스코를 선택한 것.
또한 국내에서 도산공원 앞에 위치한 스토어의 위치 선정에 있어서도 다른 브랜드라면 눈에 잘 띄는 곳에 위치한 큰 규모의 매장을 열었을 테지만 마크는 대로변이 아닌 골목 안쪽을 선택했다.
이런 그의 독특한 철학을 알아주듯,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 있는 매장은 지역의 랜드마크로 여겨질 정도로 스타일리시한 멋쟁이들이 몰려드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의 아동복 라인과 맨즈라인도 하나 둘 이 지역에 들어섰으며 마크는 이런 스토어들이 모두 모여있는 마크 랜드(Marc Land)를 구축할 계획을 밝혔다
그의 광고 및 캠페인도 그만의 스타일을 녹여냈는데,
마크 제이콥스의 광고 사진의 대부분은 독일 출신 사진가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가 촬영해 왔다.
그는 플래시가 장착된 카메라를 사용해 가공되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폴라로이드 풍 사진을 주로 찍는데
보통 선명하고 화려한 타 브랜드들의 상업 광고 화보에 흔히 사용되지 않는 기법으로
신비로우면서 노스탤직한 느낌을 준다.
마크는 루이 뷔통 수석 디자이너 시절 함께 협업한 다양한 예술가들과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인맥으로 유명한데,
그들은 마크의 창작 활동에 직접적인 도움과 영감을 주었고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광고 모델로 등장한 빅토리아 베컴, 다코타, 엘르 패닝, 소피아 코폴라, 위노나 라이더 등은 모두 그의 절친들이고 포토그래퍼 텔러는 이러한 스타들의 화려한 겉면을 걷어낸 친구 마크의 시선으로 보는 듯한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일상의 모습을 광고에 담았다.
마크는 2000년대 초, 절도 사건으로 이미지가 급격히 하락한 배우 위노나 라이더를 과감하게 모델로 기용했으며, 깡마른 체형과 부자연스러운 외모로 언론의 먹잇감이 되곤 한 빅토리아 베컴이 쇼핑백에 담겨 있는 모습을 담은 유머러스한 화보도 찍었다. 이슈가 되는 모델들을 선정해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친근하게 담아내는 그의 광고 화보는 언제나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또한 마크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 60개 이상의 자선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동성애 결혼 지지, 티베트의 분리 독립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하기도 한다.
2006년에는 마크의 파트너 더피가 악성 흑색종을 진단받은 것을 계기로 피부암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켐페인을 시작했다. 피부를 보호하자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빅토리아 베컴, 하이디 클룸, 마일리 사이러스 등 자신과 친분이 있는 셀럽들에게 누드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고 그 모습을 티셔츠에 담아 판매했다.
이 캠페인에는 수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조성된 4백만 달러의 기금은 뉴욕대 암센터에 피부암 치료를 위한 연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티셔츠는 마크 제이콥스를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로 거듭났는데 뉴욕에 거주할 때 길거리에서 이걸 입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본 기억이 난다.
마크 제이콥스는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누리는 몇 안 되는 스타 디자이너이다.
2006년 운동과 체중 감량으로 근육질 몸매로 변신한 그는 문신이 가득한 누드 사진을 공개했으며,
마약중독과 재활 치료, 동성 애인들과의 화려한 연애사는 파파라치들에 의해 연예 가십난의 소재가 되는 등 50세를 훌쩍 넘은 나이에도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파란만장한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의 수많은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천재’라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애완견조차 인스타그램에서 26,000명의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이며
패션쇼와 마크가 개최하는 연말 가장무도회 파티는 전 세계의 스타들과 예술계의 명사들이 모이는
뉴욕의 가장 중요한 사교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는
2010년에는 미국 타임 지가 선정한 ‘올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예술가 부분 18위에 올랐다.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게이 11위에 선정되기도.
그리고 제2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 기사훈장’을 수여받았다.
마크 제이콥스의 성공은 그의 독창성과 스타성에 크게 기반해 있지만
사업 파트너인 더피와의 환상적인 팀워크의 결과이기도 하다.
1984년 함께 브랜드를 런칭한 이래, 이 둘은 현재까지 꾸준히 좋은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더피는 감정 기복이 심하도 불안정한 21세의 마크에게 숨겨진 반짝이는 천재성을 발견해 낸 장본인으로, 마크는 그의 측근들이 ‘더피가 없었으면 노숙자로 전락하였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종종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심각한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마크를 설득해 재활치료를 받게 하고 재기에 성공시킨 것도 더피였다. 그는 타고난 수완을 가진 사업가로 '마크 제이콥스' 라인 이외에도 세컨 라인을 런칭하도록 하였고, 이 두 브랜드를 전 세계의 매장으로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마크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좋아한 것을 맘껏 누리고 푹 빠져 살았단 인상을 받았다. 이런 경험들이 그가 삶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아름답고 대담한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었던 원천이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네이버캐스트, 다운타운의 에너지와 업타운의 세련미를 혼합한 패션계 흥행의 마술사 마크 제이콥스
'패션의 탄생', 강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