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 드라마, <유어 아너> 후기
유어 아너(Your Honor)는 미국 법정에서 판사를 정중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번역하면 "존경하는 재판장님" 쯤 되겠다. 아마 미국에서는 ‘Your Honor’라는 말로 판사를 부르며, 판결을 내릴 때마다 자신의 명예(your honor)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비롯된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 <유어 아너>는 근대 이후 대부분의 법치국가에서 판사에게 부여한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명예가 얼마나 하찮은지 처참하게 까발린다. 그리고, 하늘을 유영하던 그 명예는 바닥을 뚫고 급기야 저 깊은 땅속까지 추락해 버린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명예까지 던져버린 송판호는 결국 아들을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김강헌은 둘째 아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가진 모든 권력을 총동원하지만, 사랑하는 막내딸까지 잃을 위기로 몰린다. 판사라는 최고의 명예를 가진 송판호도, 막강한 힘과 부라는 권력을 가진 김강헌도 그보다 훨씬 사소한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 낸 복잡한 변수를 통제하지 못해 결국 무너진다. 그리고 송판호에서 김강헌으로 이어지는 독백을 통해 자신들의 오만과 자만에 대해 반성한다.
송판호: 난 내가 사람의 죄의 무게를 달고, 그 무게에 맞는 벌을 내리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어.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지. 어차피 인간의 죄는 어떤 형태로든
송판호+김강헌: 합당한 처벌이 일어나거든.
김강헌: 인간의 관계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들로 말이야.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숨긴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 결국엔 그 죗값을 받게 되더라구. 아무리 버둥대고 도망쳐봐도 죗값은 반드시 찾아오게 돼 있어.
상현이가 죽은 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 내 죗값일 거야.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저지르고, 그렇게 저지른 죄를 숨기기 위해서 더 큰 잘못을 하고, 인간의 삶은 그렇게 이어지게 돼 있지. 그 모든 잘못들이 어떤 형태로 나에게 다시 찾아오는 거야. 내가 저질렀던 짓들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숨겨진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지만, 숨겼을 땐 훨씬 더 큰 벌로 찾아오는 법이야. 잘못을 깨닫고 반성을 하면 죗값에서 피할 수 있었을까? 이미 저지른 잘못이 있는데, 반성한다고 피할 수 있을까?
송판호+김강헌: 벌은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거야.
송판호: 호영이 사고가 일어난 후 난 참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아니, 그전부터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벅찬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왔던 것 같아. 숨길 생각 없어.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 다 얘기해 줄게.
송판호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담당했던 강소영 검사(정은채 분)는 차갑게 대답한다.
강소영: 아니, 벌은 순서대로 받아야지. 먼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김강헌이야. 당신의 죄는 김강헌을 잡은 이후! 그때까지 당신 가슴속에 파묻어 둬. 우습게 말 한마디로 자책하면서 그 무거운 죗값 벗어내려고 하지 마.
두 주인공의 독백에 이어, 작가는 <유어 아너>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마지막 장면, 송판호와 김강헌의 대화를 통해 전달한다.
김강헌: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복수를 할 생각인가? 무슨 힘으로...
송판호: 아니, 복수가 아니라 반성! 우리가 저지른 잘못, 당신과 난 반성해야 돼.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그렇게 저지른 잘못들이 왜 이런 결과를 불러왔는지...
김강헌 : 나는 내가 이 끔찍한 상황을 심판하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믿었었지. 자만했던 거야.
그동안 수없이 고민을 해 봤어. 왜?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된 걸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겠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게 만드는...
<유어 아너> 마지막화는 오만과 자만에 대한 때늦은 깨달음과 반성, 그리고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건 진흙탕 속에서 구르고 있는 정치라는 씁쓸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질 직업들에 대해 걱정하기 훨씬 이전부터,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정치는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세상은 단순해선 안 되고, 평화로워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시작된 정치라는 사회체계는 정작 그 쓸모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현실을 복잡한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대통령 비서실장(안내상 분): 믿어볼 수 있을까?
강소영 검사: 아무래도 김강헌 회장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복수심? 너무 1차원적이지 않나?
정이화 의원(최무성 분): 정의나 사명감 같은 신념으로는 이미 패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 무너졌어요. 그런 것들은...
대통령 비서실장: 잘 조련해 보자고. 반듯하게 자란 사냥개만큼 무서운 건 없을 테니까, 조만간 내가 직접 만나 볼게. 그 사이에 잘 닦아놔~
사실 명예가 판사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두 각자가 지켜야 할 서로 다른 무게의, 서로 다른 종류의 명예가 있을 것이다. 아마 하찮은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에게도 잘 찾아보면 어딘가 한 구석에 명예가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얼마 전 드라마 중간에 후기를 쓸 때는 "유어 아너"가 미국에서 판사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었다. 몰랐다고 쓰지 않고 굳이 "망각"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필자의 무지를 숨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 후기를 읽은 지인이 그 사실을 말해 주었을 때,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느낌보다, 미국 법정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나왔던 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모르지 않았다. 다만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비록 물질적 결핍을 감내하며 살고 있는 백수지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해서라도 하찮은 백수의 명예를 지키고 싶음이니 널리 이해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