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부터 부녀지간처럼 지내온 후배가 있다. 지난 11월 2일은 그 후배의 생일이었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선물을 해 주었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매년 잊지 않고 문자나 카톡, 또는 전화를 통해 생일을 축하해 주었었다. 그런데, 어제... 무려 일주일이나 지난 후 내가 놓쳐서는 안 될 생일을 그냥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핑계를 대자면... 11월 들어 1일, 8일, 그리고 돌아오는 15일 주말마다 학술대회 발표가 있어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뒤늦게 카톡을 보냈다. 그냥 지나쳐서 미안하다고...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난 애들 다 내보내고, 주말마다 아내랑 관광버스 타고 꽃구경, 단풍 구경을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행 가서 찍은 부부 사진을 보내줬다. 후배 왈,
결국 부부밖에 없더라고 ^^
언니한테 잘해~
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아내가 만족을 못 한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후배가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졌다.
은근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 ㅋㅋ
후배의 그 한마디에 결혼 후 지내왔던 일들이 휙~ 하며 스쳐 지나갔다. 맞다.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난 결혼 후 '은근'이 아니라 '대놓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회사에서 월급이 밀려 생활비가 없었을 때도, 경선 문턱도 넘지 못할 것 같은 친구가 구청장 선거를 도와달라고 해서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임기제긴 하지만 무려 4급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백수가 되었을 때도, 코로나 시절 백수 주제에 박사공부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도, 공부를 하러 공주를 왔다갔다 하며 밴드를 한다고 했을 때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아내는 나를 무지무지 사랑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논문 끝자락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백수 남편을 이해해 준
보살 같은 옆지기에게도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랬던 아내가 얼마 전 더 이상 보살 같은 아내로는 살지 않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돈을 벌어 오라고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지금 이 시간에도 카페 한 구석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다. 집안에 우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이면 난 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