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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Oct 13. 2021

언해피? - 샤브샤브 - 해피!


 


오늘은 정말이지 별로인 날이었다. 퇴근 후 전화를 걸어온 언니가 내 목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니. 별 일은 없어. 별 일은 없지만 별 일이 없기 때문에 별로인 날이야. 마치 내가 부스러기가 된 것 같달까.



기운없는 퇴근길에는 반드시 맛있는 것을 먹어주어야 한다. 부스러기 같은 나를 위해 온전한 요리를 먹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요리는 싫다. 분에 넘쳐서 남기게 될 음식이라면 나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들테니까 그것만은 절대로 싫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1인용 샤브샤브집을 향해 달려간다. 8시가 조금 넘으면 주문 마감을 하기 때문에 잽싸게 서둘러야 한다. 비어있는 바에 앉아 1인용 냄비를 받아든다. 오늘은 매콤한 토마토 샤브샤브를 시켰다.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야채들을 퐁당 퐁당 집어넣는다. 청경채, 느타리, 새송이, 숙주. 깜찍한 사이즈의 만두와 옹졸한 떡, 작은 단호박도 있다. 그것들이 김을 펄펄 내면서 익어가기 시작할 즈음 소스접시를 꺼낸다. 간장소스와 칠리소스들을 아낌없이 듬뿍 짜낸다. 그 위에 얼큰한 청양고추 다대기도 몇 스푼 얹는다. 입천장과 혀를 데이지 않도록 신중을 기울여 채소들을 꺼내먹다보면 어느새 만두와 떡이 익어있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옆 자리에 사람이 앉았다. '마라맛 샤브샤브요' 마지막 오더였다. 오오, 럭키. 간신히 세이브하셨군요. 저녁 식사를 굶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분명 속으로 세레머니를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함께 속으로 세레머니 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당신 옆에서 땀을 흘리며 샤브샤브를 먹고 있는 풍채 좋은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시겠지만요.


고기를 능숙하게 샥샥 찹, 샥샥 찹, 하고 익힌다. 개그맨 김준현씨가 고기 굽는 리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칙칙 탁, 칙칙 탁, 이렇게 리듬에 맞춰 끊임없이 먹어줘야 배가 쉽게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나 역시 흐름을 끊지 않고 물 흐르듯 고기를 먹는다. 이제 남은 건 죽이다. 고기와 야채를 끓인 육수에 화룡정점으로 죽까지 먹어야 완성이다.


그 때,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불쑥 바 안에 대고 말을 걸었다. '저, 이거 처음먹어봐서 그러는데 죽은 어떻게 끓여먹어야 하는거죠?' 아아, 맙소사. 내가 대신 끓여주고 싶다! 저기요, 고기와 야채 육수가 듬뿍 베어있는 그 엑기스 국물은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빈 접시에 스프처럼 담아주세요. 그리고 밥과 참기름과 김가루를 자작하게 끓인 뒤에 계란을 톡, 까서 그 위에 넣고 빙글 빙글 돌리는겁니다. 그리고 제발, 제발 김치 한 그릇 추가하세요. 몽글몽글하게 익은 그 죽을 한 수저 떠서 엑기스 국물에 한 번 담궜다 뺀 뒤, 작은 김치를 얹고 후후 불어서 입에 넣는겁니다. 샤브샤브의 꽃은 바로 그 한 입이라고요! 속으로 열변을 토하며 죽을 끓여주는 상상을 한다. 물론 그는 당신 옆에서 땀을 흘리며 샤브샤브를 먹고 있는 풍채 좋은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시겠지만요.





배부르게 죽까지 다 긁어먹고 식사를 마쳤다. 이제 나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뚱뚱한 단팥빵이 된 기분이다. 내 속에 아직도 따뜻한 샤브샤브를 품고, 서점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이 또 신작을 냈기에 두 권을 샀다.





언 해피에서 해피로 변신하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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