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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Nov 24. 2021

코울슬로처럼 절여지는 시간

 


사이드 미러를 깨뜨렸다. 항상 주차하는 곳에서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매일 보던 벽이고, 매일 대던 곳인데 도대체 왜? 이 순간 난 대체 어딜 보고 있었던걸까.



그리하여 오전 내내 꺼이꺼이 상태로 지냈다.


서비스 센터 직원분은 아작난 사이드 미러 앞에서 동동 거리는 나를 보고는 휴게실에 앉아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셨다. 당장 새 것처럼 고칠 수도 없으니 일단은 운전 할 수 있게 유리만 갈아끼워주겠다면서 말이다. 연말에 돈 나갈 곳도 많은데 터무니 없는 곳에서 지출이 생기니 속이 쓰렸다.


축 쳐진 채로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당근과 양배추가 가득 쌓여있었다. 저번 주에 수업하고 야채가 잔뜩 남아버려서 빠른 시일 내에 어떻게든 해치워야 했다. 서러운 마음을 담아 양배추와 당근을 자근자근 작게 썰었다. 그리고 커다란 볼에 담아 소금에 절여놓고, 식초와 설탕과 레몬즙과 마요네즈와 우유와 후추를 뿌려 소스를 만들었다.



코울슬로는 해놓고 바로 먹어도 맛있지만, 야채의 숨이 죽을 때까지 시간을 좀 흘려보내야 진짜로 맛있어진다. 아침의 속상함이 가라앉을 때까지 코울슬로는 잠시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놓기로 했다. 오전에 차수리를 하느라 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느긋히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퇴근한 뒤의 저녁. 내 [꺼이꺼이 상태]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새콤한 소스가 잘 스며든 코울슬로를 그릇째 퍼먹으면서 힐링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에 속상했을 때는 몰랐는데, 배고픔이 가시니까 여러가지 마음이 버무려져 시큼 새콤하게 몸 속에 쌓여간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코울슬로를 만들었던 것은, 요즘 내 상태가 꼭 코울슬로 같아서 일지도 모른다. 요즘의 나는 서서히 절여지듯 깨달아가는 중이다. 항상 대단해지길 바랬었는데, 어쩌면 평범했기 때문에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하고, 노력이 필요한 힘겨운 것인데, 어쩌면 너무 힘들게 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만큼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아침의 느긋함을 반납하고 부지런하게 산다면, 나는 분명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내가 아침의 느긋함을 사랑했고, 나무늘보 같은 상태의 나를 꽤 좋아했던 것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맛있어지는 코울슬로 처럼, 평범한 시간에 나를 잘 절여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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