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ife in US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tween time Sep 23. 2019

코묻은돈

앙꼬에게

우리는 앙꼬와 찐빵이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별명 짓기를 좋아하는 내가 서로의 애칭을 만들자고 제안했었고, 고민 끝에 우리는 앙꼬와 찐빵이 되었다. 앙꼬 없는 찐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에 간다고 얘기했을 때 앙꼬는 덤덤했다. 정확히는 내가 미국에 간다고 말했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정적인 반응이었다. 다들 걱정과 반대가 있는 중에 앙꼬만큼은 미국 가기 전에 더 부지런히 많이 만나자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나를 무척 편안하게 해 줬다. 약간에 담백함이 묻어나는 그 말에 서운하기는커녕 너무 좋았다. 그때 나는 매일 너무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담백함이 가장 완벽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대학교 1학년 때 서로 아싸(일명 아웃사이더) 일 때 만났다. 입학 전 OT, 신입생 환영회에서 이미 친구들 무리가 형성된 것 같았고, 그 M.T를 가지 않은 나와 앙꼬만 남아서 자연스럽게 둘이서 다니게 되었다. 20살 우리가 만났을 때부터 앙꼬는 나에게 약간 엄마와 언니에 중간 사이쯤이었다. 처음 자취를 해보는 20살에 나는 삶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했었다. 혼자서 자립하는 것이 무엇인지, 뭘 어떻게 챙겨 먹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마다 앙꼬는 혼자 살면 과일 챙겨 먹기가 제일 힘들다고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과일을 사다 주곤 했다. 본인이 재수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혼자 사는 나를 많이 이해해주고 챙겨주곤 했다. 그런 면에서는 그녀는 이미 나보다 꽤 성숙했다.


또 언니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했을 때는 시험기간이었는데,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아직도 망나니 같이 생각하고 있을 때 무조건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앙꼬 옆에서, 친구 없는 나는 덩달아 같이 공부해서 그나마 학점관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1등은 앙꼬가 했고 난...


우린 대학 4년 내내 단둘이 꼭꼭 붙어 다녔다. 남자 친구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너무 둘이 꼭꼭 붙어 다녀서 라고 친구들이 놀렸지만 정말이지 둘이서 졸업했다. 그렇게 새로운 역사인 20대 첫 페이지를 함께 열었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만큼 많은 추억을 쌓았다. 졸업 이후에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적당한 방황과 직업적 이직을 반복했고, 결국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앙꼬도 적당한 반항과 직업적 번뇌 이후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내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 앙꼬도 취업에 성공했다. 한 3-4년 서로 적당히 돌고 돌면서 비교적 비슷한 시기에 취업에 성공했다.


방황의 시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리 멀어지지도 또 처음처럼 다시 가까워지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때는 서로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각자의 삶에서 발버둥 치기 바빴다. 때론 함께 울기도 했고, 괴로워하면서 직업적인 자아를 찾아가던 시기였다. (물론 여전히 찾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긴 방황 이후에 취업했고, 그 이후에 우리는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제법 평균적으로 만남의 횟수를 정해놓고 만날 정도로 안정적인 만남을 이어갔다.


이제는 우리 사이에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로 물리적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직업을 갖게 되면서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그건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틈틈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물리적 거리는 어떨지 상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물론 생각하는 것과 현실에서 겪에 되는 경험들 사이에 괴리감은 늘 부딪치면서 알게 된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하네'라고.


앙꼬는 내가 떠나올 때 작은 봉투와 카드를 줬다. 그 봉투가 너무 뚜렷해서 나는 받자마자 이게 돈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웃으면서 우리가 이런 사이냐고 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반응이었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앙꼬는 경제관념이 뚜렷하다. 나처럼 충동구매도 하지 않았고, 늘 계획적인 소비를 했다. 그녀가 얼마나 알뜰하게 돈을 쓰고 모으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이 작은 봉투가 너무 무겁게 그리고 크게 와 닿았다. 봉투와 함께 건네준 카드 속에는 남편에게 말하지 말고, 미국에 가서 사고 싶은 거 있을 때, 먹고 싶은 거 있을 때, 눈치 보지 말고 실컷 쓰라고 했다.


직장을 잃는다는 건 단순하게는 돈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노머니' 세계에 대해서 종종 두려움을 나타내곤 했었는데, 그걸 염두에 둔 그녀의 배려와 걱정이 묻어있었다. 전업주부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된 친구에게 앙꼬는 나보다 더 먼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결혼도 안 해본 네가 어떻게 이걸 다 아느냐고 너무 많이 알아서 결혼 못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안 울려고 했는데 에잇- 그냥 울어버리는 게 더 시원할 것 같아서 펑펑 함께 울었다.


그 돈을 쓸 생각만 해도 울컥해지고 뭐랄까 알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휘몰아쳐서 잘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었다. 추억도 때로는 이 코 묻은 돈봉투와 비슷하게 다가왔다. 너무 소중해서 꺼내보기 힘들었고, 한 번 꺼내어보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에 파묻혀서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부러 잘 열어보지 않으려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그 봉투를 꺼냈다. 다른 건 쉽게 잘 잃어버리지만 이건 어디에 간직해놓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6개월 지 조금 넘어가는 지금도 나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우리가 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거나 서로의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때론 서로의 시차를 위해 무리해가면서 새벽 늦은 시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또 전화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일상을 알게 된다. 앞으로 우리 사이에 또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추억들이 어디든 우리 사이에 알맞은 방향으로 불어주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그리도 힘드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