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영어실력이 향상되었다.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테고 내가 칭찬해주면 너무 이른 것 같다고 겸손하지만 옆에서 지난 8개월을 지켜본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남편 너 영어 말하기가 굉장히 자연스러워졌어.
처음 오롯이 둘만의 미국 정착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서로의 영어 회화를 놀리곤 했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발음이 그게 아니라고 서로를 다그쳤었다. 많이 미흡했고 때로는 마트에서 산 물건을 환불받는 것과 같은 단순해 보이는 문제에서도 원하는 바를 잘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첫 한-두 달은 남편과 나 모두에게 초주검 같은 날들이었다. 남편은 매일 퇴근 이후에 집에 오면 가장 먼저 오늘도 귀에서 피가 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회사에 대화에 끼지도 못할 뿐 만 아니라 회사 직원들이 하는 말에 30-50% 정도만 이해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같이 괴로워했다. 나는 말이야 오늘 마트에 갔는데 계산원이 하는 인사에도 너무 떨려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서로의 웃픈 흑역사들을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남편은 어느 순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인지 나도 느끼지도 못했다. 자연스러워졌고 점점 빠른 속도로 영어를 습득하는 것 같았다. 매일 퇴근 이후에 오늘 배운 표현들을 내게 알려주곤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잘 쓰지 않는 단어 몇 개 정도였다면, 점점 문장으로 이런 표현들이 좋다고 배웠다고 알려줬고, 그다음에는 스스로 다음 점심시간에는 자기도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화에 끼겠다고 다짐했다.
초반에는 힘들어도 퇴근 이후에 영어공부를 하라고 내가 먼저 채근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은 회사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이후에는 나와 함께 저녁 ESL 수업에도 참석했고, 적극적으로 공부했다. 옆에서 보는 내가 이러다 원어민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장난반 놀리곤 했었는데, 어느 날 그는 부쩍 성장해 있었다.
남편도 처음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짐작만 할 뿐 그의 머리 빠지는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영어 노출 환경이 나보다는 좋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오롯이 황무지 허허벌판에 혼자 인 듯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특별한 노력 없이 회사에서 외국인을 만나고 대화한다. 일과 영어 공부를 동일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듣기와 말하기가 해결되었다. 물론 퇴근 이후에 추가적인 공부도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정말 노력하면 저렇게 실력이 느는구나 라는 여러 생각과 함께 그럼 나는? 나는 지난 8개월 동안 어디를 표류하고 있었을까? ESL 수업에 나가면 미국에서 3년 살았어요는 기본이고 길면 7-8년 정도 살았던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나도 모르게 연도는 정말 아무 의미가 없구나.. 영어실력은 정말이지 내가 노력해서 온전히 획득해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대부분이 가정이 있는 엄마들이기 때문에 나도 그 고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나처럼 반짝 열심히 하는 시간들도 있지만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한정된 사람들만 만나고 그럼 당연히 영어 실력이 머무르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다. 나만 해도 언어는 감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이 하루라도 외국인과 인사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후에 다시 만나게 되면 혀가 꼬이면서 단순한 인사조차도 똑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그녀들 역시 ESL에 아기와 함께 오면서라도 영어를 계속 공부하고 싶은 간절함을 왜 모르겠는가.
나는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들을 스스로 흘려보냈다. 혼자 공부해서는 실력이 늘지 않아, 라는 변명과 나는 이러다 외국인 친구는 한 명도 못 사귀는 거 아니야 라는 두려움뿐 인 마음만 넘쳐났다.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어느 날 부쩍 성장에 있는 남편과 아직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나. 조급함이 내 마음에 흘러넘쳤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았고, 남편과 경쟁하는 나 스스로가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아직 아기가 없고, 그래서 생기게 된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들을 그냥 소비해버리는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은 누구보다 객관적이지만 늘 행동 앞에 무너지고 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영어공부를 꼭 해야지,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영어책이라도 좀 읽어야지, 늘 다짐하곤 한다. 그리고 또 비슷한 날들이 반복된다.
나는 오늘도 다시 다짐한다. 남편과 경쟁하기보다는 남편을 나의 좋은 자극제라고 생각하고, 나도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을 좀 더 늘려야겠다고. 남편이 일하는 만큼 나도 살림한다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남편에게 받은 좋은 영향력을 내가 실천하도록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노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이제 제법 영어가 자연스러워졌어'라는 말이 나오는 시간들이 왔으면 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