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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ween time Feb 21. 2020

다시 쓰는 11불의 가치

꽃, 너는 무죄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한인 부부 사장님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이틀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어떤 노동에 목말라 있던 나는 짧은 시간이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꽃집 알바 최전선에 올랐다.


가기 전 나의 마음은 여러 모로 단순했다. 포장 알바라는 게 누구나 와서 당일 배워서 금방 할 수 있다니 눈치껏 잘 따라 하면 되겠지만, 밸런타인데이에 하는 알바인 만큼 여러모로 힘든 고난의 행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출근시간도 새벽 5시였다. 그래도 역시 이틀이 가장 나를 유혹했다. 이틀만 버티면 된다.


처음 꽃집에 도착해서 사장님 부부에게 인사드리고, 같이 일하게 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나에게 어떤 일이 벌이 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신기하고 설레던 순간이었다. 


인사 후에 자 이제부터 나를 따라 하면 돼요 라고 하는 사모님을 따라서 꽃이 완성된 꽃병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꽃병에 들어있던 물을 버리고 새로 갈아서 말씀해주신 장소에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일단 꽃이 이미 완성된 유리 꽃병이 엄청나게 무거웠고, 꽃병들은 모두 2층에 차곡차곡 쌓여있고 일층 구석으로 옮겨야 하는데 딱 봐도 서른 걸음 이상은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두 개째 물갈이를 끝내고 생각했다. 이건 포장이 아니잖아요.. 물론 아르바이트가 생애 처음은 아니라서 사장님들은 절대로 말한 일만 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알지만 기억이 왜곡돼서 내가 잊고 있었나 보다. 잠시 내가 돈에 눈이 멀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푼이라도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참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략 15개의 꽃병을 날랐을 때 전신에 모든 근육이 말해주었다. 대체 이걸 앞으로 몇 개를 더 해야 해!! 이건 포장이 아니잖아!!!라고. 


그래도 끝까지 끝까지 했다.


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꽃병을 나르면서 상상해보았다. 앞치마를 집어던지며 이건 포장이 아니잖아요 전 못하겠어요 라고 문을 박차고 나갈까? 그럼 한 시간 넘게 일한 돈은 받을 수 있을까 등등. 이런 끝없는 상상의 시나리오를 펼치면 어느새 다 날랐다. 나 자신이 대견하고 기특하고 내일 근육통에 얼마나 시달릴까 싶고 여러 생각들이 떠다녔다.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나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가서 돈 벌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현실은 나는 시급 $11불에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우리 집 한 달 월세 $1,400불을 생각하면 월세만 벌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아니면 지금보다 더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남편이 소중하고 감사하고 그런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그 보다는 내 한 치 앞이 너무 두려웠다. 사람이 한 치 앞을 몰라서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나곤 한다는데, 내게 지금 그 한 치 앞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차오르는 잡념들,- 

딱 봐도 한국인 아니면 아무도 와서 이렇게 낮은 시급에 힘든 일은 하지 못할 그런 일이기 때문에 나를 부른 걸까. 미국에서 살림하고 있는 한국 아줌마를 불렀을 때는 그만한 일을 주는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미국인에게 시킬 수도 없고 시켜도 그들이 하지 않을 만한 일이기 때문에 한국인인 나를 불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이틀이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왜 이틀 동안 죽도록 몸 쓰는 힘든 일을 시키기 위해서 한국인 알바를 고용한 건가. 


문득, 외국에 나오면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동포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더니. 황망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점심 제공은 더할 나위 없이 목이 메었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단 30분에 점심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10분 내로 샌드위치를 먹고 바로 다시 일을 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했다. 꼬박 12시간 동안 총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을 쉬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화병 나르고 꽃을 포장하는 일을 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동포애에 바보 같고 순진하게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숨만 쉬며 일만 했다. 누굴 탓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퇴근만을 바랬다.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웃음을 잃었다. 사장님은 내게 다가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원래 일 안 하던 사람이 서있으면 힘들다고 농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건넸다. 그럼 원래 계속 서있던 사람은 안 힘들단 말인가? 이게 대체 무슨.. 그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가게를 돌아보니 이렇게 포장하고 힘든 일은 모두 한국인이 하고 있었다. 2명의 미국인 직원도 고용했지만 그들은 모두 전화업무와 손님 응대만 했다. 언어에 한계가 있으니 내가 그 일을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라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앞으로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내야 할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뒤에 그 고된 노동의 시간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그런 생각들 가운데 나를 가장 크게 점점 이 힘든 일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블랙홀은 바로 이게 현실이라는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현실. 영어도 못하고 별달리 기술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힘든 노동으로 돈을 벌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내가 그래도 꽤 괜찮은 직장에 다녔었고 그런 건 지금 여기에서 아무 소용이 없구나.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많이 겪을 수 있기 충분했다. 언어라는 장벽이 날 가로막고 있으니까. 누구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 한국보다 훨씬 더 척박하고 메마르기 그지없는 이곳 미국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이틀이라는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는데 내가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고된 노동의 최전선뿐이 라면?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다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결혼했고 나이 들었고 특별히 내세을 뛰어난 재능도 없는데. 무서웠다.


첫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끙끙 앓는 나를 보고 남편은 당장 내일부터는 일을 가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고맙고 진심이길 바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무서웠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바라지 않으면서도 자꾸자꾸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해답 없이 날은 밝았고 대망의 첫 미국 아르바이트 여정을 마쳤다. 이틀이 일 년처럼 길고 고된 시간이었고 아픈 만큼 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게 숙제를 남겨준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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