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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원 Mar 28. 2020

덕담은 덤

점심 식사 후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려고 식어버린 커피를 꾸역꾸역 삼키는데 자꾸 전화가 왔다. 또 마케팅 수신 동의에 의해 걸려오는 치과 보험 혹은 실비 보험 혹은 대출 혹은 새로운 카드 발급 전화겠지 싶어 무시했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 그 끈질김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카드 회사였다. 내가 분실한 카드를 어떤 사람이 주웠다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카드사에 남겼다고 했다. 내가 카드를 잃어버렸었나 하고 느리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카드 회사 직원분이 연락처 하나를 불러줬고, 부랴부랴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외투 주머니, 바지 뒷주머니를 뒤지며 카드를 찾았다. 없다. 없네. 없어! 잃어버렸구나…!


졸음이 확 깨네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 카드를 습득했다는 그분께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제 카드를 습득하셨다고요. 실례지만 어디에 계시나요? 가까운 곳에 계시면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 해외여행을 앞둔 와중에 심지어 주로 사용하는 신용카드라 꼭 찾아야만 했다. 저 카드가 없으면 여행 가서 쓸 수 있는 돈의 한도가 줄어든다고! 나의 소비를 위해서라도 찾아야만 했다. 재발급받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지금 XX역에 있는데 곧 OO 사거리로 갈 거예요.’ 오 예. 다행히 회사 바로 앞이었다. ‘그럼 OO 사거리로 오실 때 연락 주세요. 회사 앞이라 바로 나가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하지만 곧바로 고민이 시작됐다. 사례는 뭘로 해야 하지?


돈으로 드리기도 이상하고, 이게 돈까지 드릴 일인가? 뭔가 사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커피나 음료? 이건 또 너무 소박한가? 음료는 뭘 해 캔음료? 카페 음료?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 회사 앞 군고구마가 생각났다. 날도 쌀쌀한데 (1월 말이었다) 따뜻한 군고구마를 드리면 돌아가시는 길에 품에 안고 가기도 좋고 집 가서 간식으로 먹기도 좋을 테지. 사실 내가 군고구마가 확 먹고 싶었던 탓도 있지만 어쨌든 너무 과하지 않고, 실용성 있는 것 같아 패딩 점퍼를 입고 회사 밖으로 튀어나갔다. 군고구마를 6개 품에 안고 카드를 전해 받을 장소로 나갔다. 횡단보도 앞에서 만나기로 한 그분은 8살쯤 돼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중년의 여성분이었다. 맞벌이 자녀를 대신해 손녀를 학교에서 픽업해 귀가하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핸드폰 케이스 지갑에서 주황색의 카드를 건네주셨다. 보통 주운 카드는 가게 안이면 가게에 맡기거나 모른 채 하고 지나가기 십상인데.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흘린 줄도 몰랐어요”

“우리 딸도 잘 잃어버려요. 주머니에 넣고 빼고 하다가 막 흘려 자기는 흘린 것도 몰라”


하마터면 오랜만에 만난 이웃사촌처럼, 왕래가 뜸했던 친척 어른을 만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눌 뻔했다. ‘할머니 우리 언제 집가?’라는 표정의 손녀를 보고 정신이 번뜩 들어 군고구마를 건네 드리려고 했다. 


“집 가셔서 드시라고요. 방금 나오는 길에 사서 따뜻해요”

“아유 괜찮아요. 당연한 일을 했고 아가씨 드세요 일하면서 힘든데”


자꾸 거절하려고 하셔서 난 우리 엄마한테 배운 일단 떠넘겨 안기고 도망가기 작전을 썼다. 냅다 고구마를 품에 안겨 드리고 뒷걸음질 치며 ‘저는 이미 먹었어요, 다시 회사 들고 가기 무거워요’ 이상한 소리 주절 거리며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일 많이 생기세요. 올해!


아참 새해였지. 뒤늦게서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무수리처럼 연신 인사를 했다. 카드와 함께 좋은 일만 생기라는 덕담까지 받았다.





<다정한 사람들>



'이 사람 왜 이렇게 다정해?' 대가 없는 선의를 베푸는 사람. 어쩌면 타고나길 다정함이 한도 초과인 사람은 날 당황하게 만든다. 건물 입구에서 문을 잡아준다거나,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기다리는 그런 기본적인 매너도 바라지 않은 지 오래돼서 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기대도 안한 다정함을 마주할 때면 적잖이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괜한 조언도 어설픈 위로도 쉽게 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매너라지만 조금은 과하다 싶은 다정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고무장갑 물을 튀기며 난데없이 날아드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 내가 몇 살인지도 헷갈리면서 늘어놓는 아빠의 걱정, 처음 본 아저씨한테서 듣는 인생 팁, 자꾸만 곁에 와서 맛있게 잘 먹는지 지켜보며 말로 거드는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열정,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표정과 손짓으로 자꾸만 나를 이해시키려는 타지에서 만난 현지인의 노력.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로소 소중하고 즐거운 내가 본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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