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일기 4. 스펀, 진과스, 지우펀 그리고 고양이
가장 무난한 대만 여행을 하는 날. 대만에 온다면 꼭 가야 할, 대만 일일 투어에서 꼭 빠지지 않는 곳들만 모았다. 기찻길에서 천등을 날릴 수 있는 <스펀>, 광부 도시락으로 유명한 <진과스> 그리고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배경지이자 홍등이 빛나는 <지우펀>까지. 사실 진과스 대신 고양이 마을로 불리는 <허우퉁>에 가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허우퉁이 빠지고 진과스가 들어갔다. 진과스를 빼고는 대만에 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왔던 곳이지만 엄마는 처음이기에 모두 다 집어넣었다.
그간의 경험을 살려 대만 철도 사이트*에 들어가 미리 시간표를 살펴봤다. 11시 34분에 허우통까지 가는 TRA를 타려 했으나 50분이 넘게 기다려야 해서, 10분 뒤 10시 54분에 출발하는 루이팡행 열차를 타기로 했다. <타이베이 ~ 루이팡 - 허우통 - 스펀> 순이라 최대한 스펀에 가까운 허우퉁까지 편하게 가고 싶었지만!
루이팡에 도착하자마자 3번 플랫폼으로 이동해 핑시선을 탔다. 우리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루이팡역에서 하차, 모두가 같은 플랫폼으로 이동해서인지 플랫폼 이동에만 시간이 꽤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다림 없이 바로 핑시선을 탈 수 있었단 거고 더 다행인 것은 TRA에 이어 핑시선에서도 앉을 수 있었단 것. 얼마나 행운인가!
*대만 철도 사이트
https://www.railway.gov.tw/tra-tip-web/tip
바라는 건
언제나 로또 당첨
주말이라 그런지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리고 우리 앞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걸었다. 모두 빨갛고 노란 천등에 소원을 적고 있거나 날리고 있었다. 자주 와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여전히 설레었다.
전에는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천등을 날렸는데 이번에는 <가용 엄마>라는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언젠가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곳으로 사진을 기똥차게 찍어준단다. 보통 DSLR로 사진 찍어주는 걸 꺼려하는데 여긴 기꺼이 찍어주고 동시에 핸드폰으로 영상도 찍어준단다.
엄마와 네 면을 반씩 맡아 소원을 적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내 소원은 ‘로또 당첨’과 ‘연봉 인상’. 너무나 현실성 없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소원이 아닐까. 내 천등 속 내용을 알아보는 한국인들마다 웃었다. 그들도 나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겠지?
먹이 다 마른 후 기찻길에서 천등을 날렸다. 날리기 전에 직원들의 주도하에 사진 백여 장을 찍었다. 역시 유명한 곳은 다 이유가 있다. 천등을 날리는 순간, 날리고 나서도 사진을 꽤 찍어줬는데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신나 해서 좋았다. (이후 여행에서도 만족스러웠던 이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용 엄마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스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본 고양이 두 마리. 날이 좋아서 그런지 두 마리 모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깼는지 근처에 앉아 쉬고 있는 나와 엄마 곁을 맴돌았다. 너네 개냥이구나?
뒷골목까지 구경하고 메인 기찻길로 나왔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피해볼까 하고 기찻길 옆 마을로 갈 수 있는 다리를 건넜다.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리 건너 마을에도 사람이 많았다. 전에는 이 마을까지 오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기찻길에 비하면 여유로웠다. 엄마와 동네 버스정류장 암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쉬었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루이팡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루이팡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키면 허우퉁에 내리는 것으로. 다리 건너 기찻길 바로 옆 택시가 쫙 서있는 주차장을 지나는데 한국인 둘이 말을 걸었다. 택시를 타고 진과스에 가려하는데 혹시 택시비를 반씩 나누고 같이 갈 생각 없느냐고. 진과스는 계획에 없었지만 허우퉁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기도 했고, 가지 않는다 해도 루이팡으로 돌아가 버스를 타고 지우펀까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져 흔쾌히 동의했다. 말을 건 이들이 여자라 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도시락 말고 고양이
택시를 타고 한참을 돌고 돌아 진과스 도착. 가까운 줄 알았는데 꽤 거리가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면 산등성이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집들이 보였다. 지우펀의 모습과 조금 비슷했다. 아무 생각 없던 곳이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진과스에 대한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다.
과거 금광이었던 진과스를 관광지로 이름 알리게 한 ‘광부 도시락’. 하나는 도시락을 받을 수 있는 메뉴로 시켰다. 당연히 도시락에 나오겠거니 했는데 음식은 일회용 도시락통에 나오고 보자기에 곱게 싸인 도시락은 따로 내주었다.
음식은 무난했으나 이 것만을 맛보기 위해 진과스에 올 정도는 아니었다. 엄마도 나와 같은 생각.
하지만 도시락이 아니라면 왜 진과스에 와야 하는가. 볼거리가 없었다. 별다른 것이 없더라도 풍경 하나만 좋으면 만족하는 난데 풍경조차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푸른 식물들로 사방이 뒤덮여 있는데 왜 이렇게 심드렁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그간 이보다 더 푸르른 곳을 너무 많이 다녔기 때문일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으로 내부를 터덜터덜 돌아다녔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감탄을 자아내는 모습도 나오긴 했다.
안녕 고양이! 스펀에 이어 진과스에서도 자고 있는 고양이를 만났다. 거기다 귀엽게 남겨놓은 고양이의 발자국까지. 이 흔적으로 진과스에 올 이유가 충분해졌다. 도시락도 다 필요 없어. 고양이만 있으면 돼.
빛나는 홍등,
빛나는 지우펀
788번 버스를 타고 지우펀으로 향했다. 나는 바로 다음 정류장이 지우펀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우펀이 아닌 다른 지명이 나와 당황했다. 다급하게 구글 지도를 켜보니 지우펀으로 잘 가고 있어 안심. 지난 여행에선 한 정거장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또 스스로 기억을 조작했구나.
지우펀에 오면 꼭 먹는 땅콩 아이스크림. 이제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지만 원조의 맛은 따라올 수 없다. (사실 지우펀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원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맛본 건 이 곳이 처음이므로 내 마음대로 원조라 한다.)
노을 맛집 지우펀. 홍등이 켜진 지우펀을 보기 위해선 해 질 녘에 오는 게 좋다. 너무 이른 시간에 오면 홍등이 켜지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므로.
전망대를 오가며 지우펀을 바라보다 해가 조금 더 넘어가는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카페로 들어갔다. 처음 대만에 왔을 때부터 매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카페 <suidcha>. 밖에서 보는 내부의 인테리어가 멋스러워 기억해뒀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카페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안개가 빠르게 차고 빠지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구경했다.
드디어 해가 다 졌다.
지우펀은 해가 지면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 타이베이 여기저기에서 여행을 즐기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이 곳으로 몰려든다. 홍등을 보기 위해. 그들 틈에 끼어 같이 홍등을 보러 가는데 “왜 센과 치히로가 행방불명되었는지 알겠다”라 말하는 한국인의 말이 내 귓가를 때렸다. 그래, 진짜 여기라면 행방불명되었다고 해도 이해가 가긴 하네. 인파에 꽉 껴서 사진을 찍다 보니 홍등에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 지쳐서 그래 지쳐서.
숙소로 돌아오려고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니 끝을 모르고 길게 늘어선 줄에 기겁했다. 앉아서 기다릴 곳도 없어 지나가는 택시를, 흥정도 않고 잡아탔다. 몇 년 전엔 750TWD를 주고 탔던 택시를 1,200TWD나 줘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2017년 4월 15일
캐논 EOS 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