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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pr 10. 2019

피렌체에 취하다

혼자 이탈리아 여행 03 글에서 술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
by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여행 3일 차
피렌체


이른 아침,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가죽 시장에 들어서자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고요한 아침을 깨우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시장을 지나 길가에 위치한 상점들도 저마다 오픈 준비로 바빴고 이미 가게를 연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도시의 골목길은
큰길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큰길은 쇼핑할 수 있는 브랜드샵이 많고 관광객과 차량으로 붐비는 반면 골목길은 작은 식당과 카페 그리고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로컬 가게가 많았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골목길은 고유의 분위기가 더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부러 골라 걸은 골목길은 이른 아침 탓인지 인적이 드물었지만 요리를 준비하는 식당의 음식 냄새와 커피 원두를 내리는 카페의 커피 향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빈티지 샵이나 갤러리, 구멍가게 등을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탈리아어로 우피치(uffizi)는 관공서, 영어로 오피스(office)를 뜻한다. 우피치 미술관은 본래 메디치 가문이 집무를 보던 궁이었는데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직계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우피치 궁과 작품들을 기증한 후 작품을 전시하는 국립 미술관이 되었다고 한다.


우피치 미술관 (출처: Biglietti Uffizi)


우피치 미술관은 세계 5대 미술관으로 꼽힐 만큼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방대한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이 전시돼있다. 특히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워낙 유명한 작가와 작품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것은 두 명의 작가였다. 바로 '카라바조'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다.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 '카라바조'는 신과 인물의 모습을 아름답게만 그리던 기존의 작품 주제와 표현에서 탈피하며, 최초로 사람들의 삶과 사물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풍속화와 정물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또한 어두운 배경 속 인물들에게 드리운 빛과 그림자로 마치 연극무대같이 집중되는 빛의 대비를 통해 동작과 표정을 훨씬 생동감 넘치게 전달했다.


<바쿠스> by 카라바조 (출처: Gallerie degli Uffizi)


카라바조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바쿠스'는 친구인 화가 '마리오 몬티니'를 모델로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포도주의 신을 이상화된 신이 아닌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젊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며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후원자는 종교적인 내용을 작품의 주제로 의뢰했는데 화가는 성모와 성자의 모습에 후원자의 얼굴을 그려 넣거나 아름다운 사람을 모델로 그려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실적 묘사를 추구했던 카라바조는 나이 든 주름과 고난을 겪은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거리의 빈민의 얼굴을 넣기도 해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카라바조의 시각과 시도는 사회의 통념을 비트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주류로 만들어버리며 큰 반향을 가져와, 예술로써 기존의 관습을 타파하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이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주문했던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


카라바조의 어두운 배경과 빛의 대비에 영향을 받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뛰어난 실력으로 남성만 입학 가능했던 아카데미의 최초 여성 회원이 되었다. 또한 여성 화가에게 금기되어있던 종교화와 역사화를 최초로 그렸고 왕후 귀족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등 예술가로서 화려한 성공을 거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by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출처: Gallerie degli Uffizi)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로, 적진의 막사에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와 동침한 후 그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한 유대인 여성 유디트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새하얗고 연약한 신체를 부각하며 유디트를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그린 반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주체적이고 용맹한 의지와 근육의 강인한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로 평가받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뛰어난 실력으로 사회의 수많은 제약과 편견을 깨부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에도 그러한 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불합리한 차별에 반항한 여성 화가와 그의 작품은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했다.




투어를 마치고 우피치 미술관 밖을 나서자 어느덧 시간이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트러플 요리를 먹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미리 찾아본 트러플 파스타 맛집으로 향했다.


여유로이 창가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는데, 이런. 전부 이탈리아어로 돼있어 트러플 파스타가 어떤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생각도 못한 일인걸?


그래서 뭔지도 모른 채 메뉴판을 손으로 가리켜 내키는 음식과 음료를 하나씩 주문했다. 과연 어떤 게 나올지 운에 기대볼 작정이었다.


<Osteria Il Gatto E la Volpe>의 트러플 리조또


이윽고 리조또와 맥주 한 병이 나왔다. 색깔과 비주얼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짭짤하고 고소한 맛의 소스에 잘게 잘린 버섯과 쫄깃하게 씹히는 밥알의 식감이 꽤 괜찮아서 무슨 버섯 리조또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트러플 리조또였다. 이건 더 생각도 못한 일인걸? 정말 놀라운 운이었다.




주문한 음료가 맥주일 줄 몰랐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 흥이 올라 낮술을 즐겨보자며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랬더니 그만 취해버렸고 결국 오후 일정을 취소한 채 아르노 강변에 있는 카페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 때렸다.


아무 생각 없이 맘껏 멍 때릴 수 있는 것
이런 게 혼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아르노 강변 카페의 마끼야또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쌌고 따뜻한 마끼야또가 속을 데웠다. 주말의 나른한 오후,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겐 여유가 넘쳤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간질이곤 지나갔다.


술에 취해 커피 맛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눈앞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왠지 낭만적이던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 일상의 소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해가 점점 기우는 늦은 오후, 카페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피티 궁전으로 향했다. 전날 늦잠으로 피티 궁전 일정을 취소했는데 오늘 우피치 미술관 가이드 투어를 들으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티 궁전의 팔레티나 갤러리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작품들을 비교하며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잘 정돈된 전시관의 느낌이었다면 피티 궁전은 동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궁전을 거닐며 방과 복도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피티 궁전의 한 전시실


그래서인지 작품보다도 화려한 궁전의 모습에 더 눈길이 갔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과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내부는 마치 그 시대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방마다 인테리어가 조금씩 다른 것도 흥미로운 볼거리 중 하나였다.




아르노 강이 보이는 베키오 다리에서 일몰을 보려 했는데 피티 궁전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밖을 나오니 이미 해가 다 진 후였다. 아쉬운 대로 피렌체 시내의 야경을 보러 미켈란젤로 언덕을 올랐다.


까맣게 물든 밤하늘 아래 반짝거리는 피렌체는 곳곳에 켜진 조명이 환하게 도시를 밝히며 생기를 띠고 있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내의 야경


밤에만 느껴지는 감성이 있다
아득하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만 밝혀지는


나는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 외딴곳에 살고 있던 케케묵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먹고살기 바빠서,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등 갖은 핑계로 외면하며 주어진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냈던 것 같다.


언제까지 모른 체하고 미룰 수 있을까. 어쩌면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내디뎌보면 어떨까. 그래, 한국에 돌아가면 여행기를 써야겠다. 노트에 그림을 끄적여보고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악보에 옮겨야겠다. 그렇게 작지만 커다란 다짐을 했다.




저녁 식사는 티본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티본스테이크는 보통 1kg 단위로 팔기 때문에 식당에서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 난감하다. 다행히 전날 가이드 투어에서 만난 분과 일정이 맞아 식사를 함께 했다.


다른 여행자를 만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서로의 여행에 대한 정보나 경험을 공유하고, 자신의 삶과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야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다가 이렇게 종종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Osteria Di Giovanni>의 티본스테이크


미디움으로 적당히 구운 티본스테이크를 썰자 바삭하게 구워진 겉과 달리 붉게 물든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베어 물자 겉면이 가둬두고 있던 풍부한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고기가 워낙 연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입에서 살살 녹는 듯한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모금씩 곁들이는 레드와인은 단 맛이 살짝 옅은 대신 혀를 알싸하게 찌르는 산미와 높은 바디감이 스테이크의 느끼함을 잡아주며 풍미를 더욱 돋웠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은 와인이었는데, 왜 이탈리아의 와인이 유명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로 숙소를 향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취해있는 것 같다. 점심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저녁에 와인 두 잔을 마셨다고 이렇게 금세 취기가 오르다니.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설렘 탓일까


금방 취하니 나름대로 가성비가 좋네, 라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벌써 피렌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구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피렌체의 밤거리를 눈에 전부 담으려 애썼다.




숙소로 돌아와 여행 다이어리의 다음 장을 펼치고 세 번째 페이지를 끄적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 다시 로마로 가기 위해 풀어놓았던 짐을 정리하곤 일찍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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