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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pr 06. 2019

여행, 혼자는 처음이라

혼자 이탈리아 여행 01 걱정과 설렘 사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불과 20일 전이었다. 너무 바빠서 쉴 엄두도 못 냈던 지난 몇 달. 새해에 접어들어서야 조금 한가해졌다. 쉬어야겠다. 아예 나를 찾지 못하게 외국에서 쉬어야겠다. 문득 1년 전 겨울이 생각났다. 동료들과 창업을 결심하면서 우리 다음 겨울에는 꼭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야지 했더랬다. 그래, 따뜻하고 여유로운 치앙마이로 가야겠다.


그런데 웬걸. 괜찮은 숙소들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항공권은 매일 가격이 치솟았다. 겨울에 따뜻한 나라는 성수기구나. 항공권 검색창 화면을 흘깃 본 동료가 “그 가격이면 유럽을 가겠네.”라며 웃었다. “에이 설마.” 그 말에 유럽 항공권을 검색해보다가 정말 치앙마이 항공권 가격과 별 차이 안 나는 특가 항공권을 발견했다. 에라 모르겠다. 덜컥 9박 11일의 로마 왕복 티켓을 끊어버렸다.




여행 1일 전
한국, 어느 도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으니 그 기간 동안 해야 할 업무들을 마쳐놓거나 인수인계를 해놓기 위해 더 바빠졌다. 그럼에도 혹시 놓치는 게 있을까 싶어 밤이 깊을 때까지 사무실에 남아 마지막으로 업무를 점검했다. 여행 가는 것도 참 번거로운 일이구나. 그래도 내일부터는 자유니까- 마음의 짐을 훌훌 털고 미루고 미루던 짐 싸기에 돌입했다.


캐리어의 80%를 차지하는 건 역시 옷이었다. 10일의 코디를 모두 구상해 옷을 챙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겨울이다. 위아래 그리고 외투까지, 인생샷을 남기기 위한 신중한 고민 끝에 고른 옷들을 돌돌 말고 꾹꾹 눌러 담았다.


짐 싸다가 신나서 만든 영상


이탈리아의 소매치기도 대비해야 했다. 우선 휴대폰 뒷면에 핑거링을 붙이고 스프링 고리를 건 다음 반대 고리를 손가락에 끼워서 누가 휴대폰을 채가더라도 손가락에 걸리게끔 만들었다. 여권과 카드는 스캔 방지 여권지갑에 넣었고 현금은 동전지갑에 분산해서 넣었다. 가방은 앞으로 메고 그 위에 겉옷을 입어, 시야가 차단되는 곳에서 가방을 건드릴 수 없도록 했다.


유럽여행 관련 커뮤니티 카페나 SNS 페이지 등을 찾아보며 강매와 소매치기, 바가지 유형들을 달달 외우고 현장의 시나리오도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렸다. 혼자 여행하는데 휴대폰이나 지갑을 잃어버리거나 사기를 당한다면 그야말로 멘붕상태가 될 테니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준비하고 싶었다.




여행 일정은 지난 주말 동안 밤을 새워서 완성했다. 구글 지도의 길 찾기로 거리와 동선을 계산해서 마치 큐시트를 짜듯 엑셀 파일에 시간대별로 갈 곳들을 촘촘히 채우고 맛집의 메뉴와 예상 경비까지 모두 정리해놓았다.



지금까지 이런 여행 계획은 없었다
이것은 극기훈련인가 여행인가


너무 타이트한 거 아니냐며 다들 경악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태연했다. 막상 가면 계획대로 안 할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늦잠이라든가) 다만 동선별로 내가 갈 수 있는 곳들을 미리 파악하고 리스트업 해놓는 게 마음이 편했다. 갈지 안 갈지는 그때 정하는 걸로.


혼자 여행을 준비하니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누군가와 같이 갔다면 여행 스타일과 취향, 예산 등을 모두 고려해서 맞춰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짐 싸기까지 전날의 할 일을 모두 마무리한 뒤 늦은 밤, 잠에 들었다.




여행 1일 차
인천 - 로마


날씨가 좋았다. 파아란 하늘이 내뿜는 청량한 아침 공기의 상쾌함을 느끼면서 집을 나섰다.


만약 기분에 냄새가 있다면
오늘 내 기분은 소다향이지 않을까


걱정 반 설렘 반에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온 탓에 출국장에서 면세점을 몇 바퀴 둘러보다 마침 예정돼있던 재즈 공연까지 보며 거의 세 시간을 대기한 후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윽고 이륙한 비행기가 구름 위를 유유히 날았다. 구름 아래보다 위에서 보는 하늘의 색은 우리가 아는 하늘색보다는 선명한 파란색에 가까웠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우와, 나 진짜 혼자 떠났구나.



인천공항에서 로마 공항까지는 무려 12시간 25분. 긴 비행시간이지만 두 번의 식사와 한 번의 간식을 먹고 네 편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피곤할 법도 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너무 설레기도 하고 괜히 이 시간을 잠으로 보내기 아까웠달까. 사실 첫 유럽여행이자 첫 혼자여행이었다. 진작 여행을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아냐, 지금부터라도 괜찮아.




처음 나온 기내식은 카레라이스였다. 식사에 곁들일 와인 한 잔도 같이 주문했는데 승무원이 내게 성인이 맞냐고 물었다. 그럼요, 제 나이가.. 서로 당황했지만 기분 좋게(?) 와인을 받아 들었다.



공깃밥을 싹싹 긁어 카레 그릇에 덜고 비빈 뒤 한 숟갈 크게 떠먹자 달달하고 짭조름한 카레와 고슬고슬한 밥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중간중간 곁들이는 미역국은 빈 속을 따뜻하게 데웠고 상큼한 오이지는 아삭아삭한 식감이 씹는 맛을 더했다. 사실 기부니가 좋아서 뭘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밥을 먹고 영화를 두 편 정도 보자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저 멀리 햇빛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으며 반대편으로 저물어갔다. 아득하고 고요한 밤을 오래도록 날았다.



비행기 안에서 본 네 편의 영화 중에서도 특히 <맘마미아2>는 졸업 후 타지로 꿈을 찾아 떠나는 젊은 도나의 이야기를 그리며 홀로 여행을 떠나는 감성을 자극했다.


“Life is short, the world is wide. I want to make some memories.”
by <맘마미아2> 중 젊은 도나의 대사


영화 <맘마미아2> 중 꿈을 찾아 떠나는 젊은 도나


이번 여행에서 꿈을 찾을 순 없겠지만 도나의 말처럼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으니까. 마음의 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 순간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멋진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온 기내식은 함박스테이크였다. 한 입 베어 물자 부드럽게 씹히면서 약간의 삼삼한 맛이 채소의 짭조름한 맛과 더해지며 밥과 어우러졌다.



후식으로 빵과 과일을 먹은 뒤 푸딩을 먹으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그냥 물이었다. 제주의 순한 물이라 쓰여있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외형 때문에 푸딩이라 착각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물 한 컵을 더 받았었는데. 게다가 물 한 병이 또 있었다. 그야말로 물로 배를 채운 식사였다.




긴 비행시간이 지나 드디어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어를 하나도 몰라서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영어로도 안내를 하고 있어 입국장과 기차역까지 곧잘 찾아갈 수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테르미니 중앙역까지 직행 기차를 타면 30분 남짓 걸린다. 티켓판매기에서 표를 끊고 탑승구에 있는 초록색 기계에서 미리 찾아본 대로 펀칭까지 마쳤다. 하지만 기차를 헷갈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시간도 버리고 벌금도 물 뻔했지만, 눈칫밥으로(한국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겨우 출발 전에 다시 내려 맞는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공항 직행 기차


기차에서 내려 테르미니 중앙역을 나오자 눈앞에 로마의 밤이 펼쳐졌다. 어느덧 어두워진 로마의 밤하늘은 너무 새까매서 마치 동화 속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로마의 테르미니 중앙역


장시간 비행에 지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둘러본 주위는 온통 낯선 사람들과 낯선 길, 낯선 건물들 뿐이었다. 한국에서 혼자 다닐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 정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랄까.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곳에서
나는 ‘나’ 혼자 존재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길을 걷고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무척 궁금해졌다. 여행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끄적이며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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