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휴가
오후 2시 30분에 카페 문을 닫는 워라밸의 나라 호주를 다녀왔다. 멜버른과 시드니의 8월은 겨울이었다. 멜버른에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경험했다. 한국과의 온도 차 때문인지 도착과 동시에 혹독한 감기에 걸려 오돌돌 떨며 전기장판을 사러 다녔다. 영업 종료 5분 전까지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담요 하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시드니는 멜버른보다 4-5도 높긴 했지만 한 블럭 사이로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지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낮 기온이 13도에도 바다에 뛰어들어 써핑을 하고 태닝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듯했다. 자연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기억에 남는 건 도시에서 만나는 풍부한 자연환경이었다.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30분만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 철퍼덕 주저앉을 수 있는 숲이나 바다가 나타났다. 왕립식물원, 본다이 비치가 그런 곳이었다. 차에 비치타월 하나 정도는 늘 둔다는 게 로컬들의 이야기다. ‘걷다가 힘들면 비치타월을 펼쳐서 공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는 거야.’ ‘나는 너희들 내려주고 손님이 별로 없으면 바다 가서 수영이나 하려고 해.’ 우리를 태워준 우버 기사가 활짝 웃으며 건넨 말이다.
높은 빌딩 사이를 걷다가도 한 블럭만 벗어나면 숲이나 거대한 공원이 나왔다. 멜버른과 시드니에 있는 왕립 식물원이 그랬다. 멜버른에서 왕립 식물원에 도착하기 전 알렉산드라 가든을 통과했다. 웅장한 야자수가 우뚝 솟은 가로수길 왕립 식물원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여줬다. 8월의 멜버른은 하루에 겨울과 봄을 다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지만 공원의 나무들은 봄과 여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묵직한 백팩과 여행의 피로로 인해 다리가 무거워졌다. 식물원 입구에 있는 벤치를 보자마자 앉아서 잠시 다리의 피로를 덜어보았다. 어깨에 나른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눈앞에 풍경을 응시하는 게 익숙해졌다. 성인 키만 한 다육식물과 웅장한 나무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al Garden Victoria)은 식물원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윈도우 배경 화면에 나올듯한 잔디밭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 두 다리를 뻗고 낮잠을 자는 사람, 일광욕 중인 사람들, 아이들과 뛰어다니는 어른들, 생일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제각각 소중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피크닉 매트나 비치 타월을 왜 트렁크에 실어두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주변 소리를 차단하기 바빠 이어폰이 필수였는데 호주에서는 귀에 새소리만 가득했다. 이어폰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꼭 뭐를 보고 가야 하나? 이렇게 자연에 파묻히니 너무 좋은걸!'
그래도 온실은 한 번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식물원 지도에 있는 Glass House(온실)을 찾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어 혹시 여긴가?'
낡고 오래된 철문을 열자마자 내부 습도와 열기가 바닥에서부터 쑥 올라왔다. 패딩을 벗고 본격적인 온실 투어를 시작했다. 입구에서 바라본 온실은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관리자의 손길이 잘 느껴지지 않아 조금 놀랐지만 하나라도 더 보고 가겠다는 의지로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꺼냈다. 돌다 보니 잘 정리된 식물원보다는 정글 같았다.
나무 기둥에 붙어 긴 실뿌리를 공중에 늘어뜨리며 자라는 고사리와 난초들이 온실의 한쪽 분위기를 압도했다. 처음 보는 희귀한 무늬의 열대 식물과 바위에 붙어 살아가는 신기한 모양의 이끼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10만 평이 넘는 광대한 공원은 잠시 쉬어가기 좋았고, 온실은 눈을 돋보기 삼아 여기저기 촘촘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오래 묵은 온실을 세 바퀴나 돌며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파묻어 가며 연신 사진을 찍어 대는 나 같은 사람들을 보니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자연환경과 기후가 한국과 다르다 보니 열대 식물 문화도 달랐다. 집 현관문만 열고 나가도 거리에 식물과 나무가 빽빽했다. 시드니는 더 온화한 기후라 한겨울에도 정원에서 대왕 몬스테라를 키울 수 있다. 이쯤 되면 실내에서까지 식물을 키우는 사람은 대단한 식물 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작고 귀여운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니어쳐 식물이나 아기자기한 테라리움을 판매하는 곳들이 눈에 띄었다.
시드니에 있는 동안 지인을 만나 Bunnings(창고형 매장)에 들러 가드닝용품 구경을 했다. 역시나 정원용 식물이나 묘목들 위주로 판매되고 있었다. 씨앗도 정말 다양해서 사고 싶었지만 괜히 잘못 가지고 들어갔다가 공항에서 곤란해질까 봐 구경만 실컷 했다.
내가 요즘 굉장히 즐겨 만드는 목부작을 봐서 반가웠다. 사실 박쥐난의 자생지가 호주이기도 하다. 식물 가격대는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좀 높고 다육식물은 4~5배까지 높았다. 한국에서 매일 보던 다육이와 선인장인데 고급스러워 보였다. 5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한국보다 식물 가격대가 높게 책정돼 있었다. 마트 안쪽에는 별별 흙과 영양제와 해충제가 다 있었고, 가드닝 작업복과 신발도 다양했다. 용품만 봐도 식물 집사들이 덕질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자칫하다 작업용 워커를 살 뻔했다.
정글 같은 곳을 걸어 보고 싶어서 여행 전에 비슷한 액티비티를 검색했다. 에어비앤비에서 'Bush Walking'이라는 체험을 보자마자 이거겠다 싶었다. 정글 정도의 밀림은 아니지만 고사리 나무들이 우거진 축축한 숲길이나 계곡을 트래킹하는 코스였다. 호주 본연의 맛을 느끼겠다는 각오로 현지인이 운영하는 프라이빗 투어를 택했다. 잠이 덜 깬 아침부터 호주 영어 듣기 평가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나와, 동행한 지인, 호주 남성 두 명이 다였다. 신형 밴에 올라타고 출발하자마자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이 시작되었다. 반 정도 알아들으며 눈치껏 따라다녔다. 고사리 나무가 넘실거리는 정글을 걸을 수만 있다면 프랑스어로 말해도 상관없었다.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굽이굽이 돌고 돌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가이드는 중간에 차를 세우고는 캥거루가 혹시 있을지 모르니 잠시 내려 보자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캥거루들이 떼로 모여 아침 식사로 풀을 뜯고 있었다.
'캥거루가 생각보다 작네? 거대한 토끼 같다.'
어린 캥거루들은 '캥거루 밥 먹는 거 처음 보냐?’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힐끔힐끔 보며 식사를 했다. 가이드가 가까이 더 다가가 보자고 했다. 숨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혹여나 우리에게 덤빌까 봐 겁도 났다. 채식을 하고도 저런 다리 근육이 생겼다는 게 나에게는 반전이기도 했다.
다시 차로 돌아와 티 타임을 가졌다. 가이드가 준비해 온 커피와 쿠키를 먹으며 살짝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본격적인 'Bush Walking'을 시작했다. 입구에 세워진 허름한 푯말을 보니 더 설렜다. 운동화 바닥에 닿는 흙의 촉감부터가 달랐다. 지인의 말을 빌리면 한국보다 더 말랑말랑했다고 한다. 여유로운 기분도 잠시였다. 다리 길이가 내 두 배인 동행인들의 걸음 속도를 따라잡느라 헉헉대기 시작했다. 몸은 고통스러운데 눈은 즐거웠다. 허리까지 오는 고사리들이 양옆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눈이 얻는 쾌락이 육체의 고통을 이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티없이 맑은 푸른 하늘이 있고 눈 앞에는 청량한 나뭇잎들이 살랑거렸다. 사방이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초록 덤불속에서 겪는 현실 도피는 짜릿했다. 전화도 인터넷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걷다 보니 너무 더워서 목도리, 패딩, 모자까지 다 벗어버렸다. 몸이 가벼워지니 몸도 가벼워졌다. 가이드의 열정적인 이야기는 점점 희미해지고 숨이 넘어갈 듯한 내 호흡 소리만 울려퍼졌다. 머릿속을 맴돌던 잡생각도 어느 때부터인지 사라지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걷다 보면 한번씩 말도 안되는 풍광이 펼쳐졌다. 유기농 우유나 치즈 광고에서 본 듯한 초원도 펼쳐졌다. 땀으로 샤워를 했지만 찝찝하지 않은 것도 신기했다. 모든 것이 낯선만큼 좋았다.
결국 첫 번째 트래킹에서 몸살까지 나버린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인 마트에서 누룽지를 샀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매일 뜨끈한 숭늉을 만들어 텀블러에 담아 들고다녔다. 내 여행 동반인은 숭늉 한모금을 소중히 여기는 나를 볼 때마다 웃었다. 어쨌거나 내 멘탈을 지탱해준 누룽지에 의지해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감기에 몸살까지 가져다준 극기 훈련 같은 호주 여행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와 등산화를 사고 초보자 등산 코스도 두세 번 다녀왔다. 호주에서 만난 고사리 숲은 없지만 내 손바닥만한 고사리와 이끼들을 보며 만족한다. 여전히 나는 조금만 속도를 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저질 체력이지만 초록에 파묻히는 짜릿함은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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