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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May 03. 2023

어리석음이 지혜로움을 이기는 순간

공자가 영무자의 어리석음에 찬사를 보낸 이유(논어, 춘추좌전)


춘추좌전 1저자좌구명출판한길사발매2006.03.30.



영무자(甯武子)의 첫 번째 어리석음



논어에서는 '역사수업'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논술 수업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로 역사적 인물의 행동과 마음에 대한 비평이 많다. 그것은 지금 나의 행동과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은 본 받고 나쁜 것은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것인데, 공자의 공부 철학(인생에 도움 되는 것을 공부한다)이 잘 나타나 있다. 영무자는 공자가 평생 공을 들였던 위나라의 지난 시절 대부였다.



춘추시대 위나라 역대 군주 일부(성공~영공)



춘추시대 지도. 노나라 서쪽에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와 이웃했던 제패국 진나라가 보인다.


위의 표를 보면 위성공의 재위 기간이 매우 복잡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퇴위와 복위가 반복되고 대신이 집정을 했었다. 영무자는 위성공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공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위영공(위령공) 때의 인물로 『논어』의 17번째 편명이 「위령공 편」인 것만 봐도 밀접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죽은 나라이기도 하고, 자로의 죽음 때문에 공자가 죽었으니 공자가 목숨을 걸었던 나라가 위나라였다. 아마도 공자는 위나라를 여행하기 전에 제자들과 위나라의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무자에 대한 언급은 그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무자는 어떤 사람일까? 『춘추좌전』에는 영무자의 활약이 소개돼 있다. 그의 임금 위성공이 매우 찌질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영무자의 활약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이다. 춘추좌전의 구절이다.


어떤 사람이 진나라에 끌려와 있던 위성공에게 원훤을 모함했다.
"원훤이 숙무를 군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때 원훤의 아들 원각이 위성공을 따르고 있었다. 위성공이 원훤을 의심한 나머지 사람을 보내 원각을 죽이게 했다. 그러나 이때 원훤은 위성공의 명을 거기지 않고 이숙(숙무)을 모시고 도성으로 들어가 나라를 지켰다.
『춘추좌전1』, 「노희공」

어리석은 임금 옆에는 간신배들이 많기 때문에 충신 원훤을 모함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귀가 얇았던 위성공은 그의 아들을 단칼에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위해서 나라를 지켰다. 위나라에는 영무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원훤도 있었다. 공과 사를 이렇게 철저히 지킬 수 있을까? 당시 전국을 제패했던 진문공이 위성공을 군주의 자리에 복귀시키자 반대 여론이 많았었던 것 같다. 이 때 영무자가 위나라의 관원과 호족들을 데리고 완복이라는 곳에 모여 '맹서'라는 이벤트를 열었다. 아래는 영무자의 발언이다.


하늘이 위나라에 화를 내렸다. 군신이 협심하지 않아 이런 우환을 만난 것이다. 이제 하늘이 위나라를 보우하려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선입견을 버리고 서로 따르게 하였다. 남아서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면 누가 와서 사직을 지키고, 군주를 따라 외국으로 간 사람이 없다면 누가 역할을 했겠는가. 서로 협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령 앞에서 맹서하고 보우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맹약이 이루어진 만큼 오늘 이후로 군주를 수행했던 사람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말고 남아서 지켰던 사람은 죄가 있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화가 연이어 그의 머리 위에 내릴 것이다. 밝은 신령과 선군의 영혼이 하늘 위에서 반드시 그 죄를 묻고 주살할 것이다.
『춘추좌전1』「노희공」


영무자가 이렇게까지 맹서하는 데 아무도 어리석은 임금 위성공의 복위를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위나라를 불행하게 할 사건이 또 위성공에 의해서 자행된다. 위성공은 맹서의 내용을 믿을 수 없고 두려운 마음에 예정된 귀국일보다 앞서 위나라로 들어갔다. 영무자는 위성공이 혹시 테러를 당할까봐 위성공보다 먼저 귀국하고 성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군주의 빈 자리를 대신했던 집정 숙무는 머리를 감던 중 임금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달려나갔는데, 위성공을 보위하던 천견이 활로 숙무를 죽이고 만다. 위성공은 숙무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머리를 허벅지 위로 숙이고 꺼이꺼이 통곡했다. 위성공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영무자가 보여주었던 어리석음은 영무자의 지난 날 잘못을 덮기로 맹서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영무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위나라가 불행해지는 일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집정대신을 살해한 혐의로 위성공은 재판에 끌려가게 된다.



영무자(甯武子)의 두 번째 어리석음


숙무의 살해에 관여한 위성공은 원훤(위성공에게 아들을 잃은 아버지)과 재판에서 다투었다. 당시의 재판은 강대국의 왕이 재판장이 되고 나머지 소송 당사자가 원고와 피고가 되는데, 소송에서 패한 경우 소송 당사자인 왕은 감옥에 갇히지만 소송을 보좌한 변호인단은 사형 등 극형을 당한다. 영무자는 위성공 측 보좌[輔] 역할이었다. 이 밖에 대부 감장자, 대부 사영 등이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하지만 위성공은 이 재판에 패하고 만다. 재판장인 진문공은 사영을 죽이고 감장자는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을 가했으나 영무는 충성스러웠다는 이유로 사면되었다. 위성공은 낙읍의 감옥에 갇혔다. 영무자는 위성공을 따라가 옥바라지를 했다.


춘추 시대에는 귀족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충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었다. 그것은 충신이 많이 배출되는 것을 기대하기 위함이다. 영무자뿐 아니라 안자춘추의 안자 역시 제나라에서 역모가 발생했을 때 죽을 위기가 있었으나 충신을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반역자들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었다. 안자는 역모를 철저히 청산했다. 영무자는 패배가 뻔히 보이는 재판의 변호인단으로 참석했고, 그것은 곧 죽음의 위기에 아주 가까웠다는 뜻일 것이다. 사영과 감장자가 극형을 받았을 때 영무자를 '충성스럽다'고 평가하며 사면한 내막이 상세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영무자가 자청해서 임금의 소송에 적극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영무자는 임금을 위해서 볏단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리고 옥바라지까지 충실히 한다. 이런 행동은 똑똑한 사람이라면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고 어리석고 미련해야 가능한 것이다. 영무자처럼 역사적인 지도자나 지식인들은 나라와 민중, 약자에게는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보였는데 공자는 논어에서 이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위나라는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했기에 임금은 역대급 바보들이면서 신하들은 역대급 충신을 배출한 것일까? 그것은 미스테리이지만 공자의 제자들도 그 점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아래 구절 외에도 논어에는 유독 위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공자가 위나라 영공의 무도함을 언급하자 노나라 대신 계강자가 말했다. "사정이 그와 같은데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하네요?" 공자가 말했다. "중숙어가 외교를 맡고 축타가 내정을 다스리고 왕손가가 국방을 완벽히 해내는데 어찌 망하겠습니까?"
논어, 헌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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