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의 힘'은 죽어도 찍을 수 없는 유권자다. 당신과 나는 '정적'인 셈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나서 마음이 너무 꿀꿀하고 싱숭생숭해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왜 200석이 아니지?' 이랬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벽 너머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거에서 패배해서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학대 받는 자의 울음소리였다. 이번 선거과정 내내 당신과 나는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 당신은 '잔말 말고 2번 찍으라!'는 억압에 시달렸을 것이다. 나는 대놓고 학대 받지 않았지만 교묘한 가스라이팅을 당한 기분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폭정을 계속 지켜보시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더 심한 정서 학대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는 국민의 힘과 민주당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정치 스토리텔링 상품을 소유하는 정치 소비자다. 이번 선거의 상품이 875원 대파처럼 부실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치 스토리텔러들을 소비하는 정치 소비자로서 당신과 나 사이에는 스토리텔러들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벽이 있었다. 그런데 22대 총선의 상품들 전반이 부실해서 나는 당신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양당제를 강요하는 정치 스토리텔링의 연출일 수도
투표를 하면서 나는 예전처럼 다채로운 선택지를 왜 가질 수 없는지 생각했다. 민주당 투표에 대한 압박은 심해지고 비례대표 제도가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뉴가 극도로 한정된 것은 나라가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마치 민주당을 찍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는 확실히 만들어진 감정이다. 마치 국민의 힘을 찍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오래 된 반복 패턴이다. 마치 투표 기계처럼 반복 패턴에 휘둘리면서 내가 깨달은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 드라마 속에 살고 있다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의 정치를 주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계 은퇴를 한다. 더는 지루한 정치 관정에 매이기 싫다는 이유였다.
진정한 정치는 이렇게 극적이지 않다. 진정한 정치는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정치는 정치인 개인의 이야기가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지 않는다. 정치가 수단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드라마틱하다 못해 드라마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TV드라마를 시청하듯 정치 드라마극을 시청하는 시청자와 같다. 나는 민주당 시청자, 당신은 국민의 힘 시청자일 뿐이다. 나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라 정치 속에서 살고 싶다.
당신의 울음소리도 아마 그것이 아니었을까? 정치 드라마에 끊임없이 소비되고 강요되고, 투표 기계로 전락하며 투표 기계인 것이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지금의 모습이 지겨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리 둘 사이에 있는 벽은 헐겁다. 벽을 통과하는 웃풍을 맞으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과 내가 한편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