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1985년작(내년이 집필 40주년이라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었을 때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앨리스>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하루키가 작품의 성채를 만들기 위해 문학 텍스트를 기둥으로 삼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어떤 기둥이 버티고 있을까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중심 기둥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앨리스>든 <성>이든 역시 또 다른 기둥들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국은 파스칼의 말처럼 "나의 책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앨리스>는 '나는 누구인가?'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앨리스가 떠나는 이유는 '지루하기 때문'인데, 카프카 식으로 말하자면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곳을 떠나기는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며 떠났던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고 어딘가에서 소멸한다. 하루키는 카프카보다는 <앨리스>의 서사를 선택한다. 출발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앨리스가 여행에서 만난 것은 지금까지 만져봤거나 먹어봤거나 읽어 봤던 경험 세계의 소재들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여행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나를 구성하는 세계가 내면적이라는 점에서 앨리스와는 다르다. 앨리스와 접점을 찾는다면 '인연'이다. 렌터카 대리점에서 자신이 여자를 웃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여자, 로큰롤 음악을 트는 택시 기사, 박사, 뚱뚱한 소녀, 참고문헌 사서는 비중에 상관 없이 무척 소중하며최후의 순간에 "나"(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그들을 위해서 축복한다. "나"(세계의 끝) 역시 도서관 사서를 사랑하기 때문에 탈출을 포기한다
<세계의 끝> 주인공들과 <앨리스>의 주인공은 '1인칭'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앨리스는 1인칭 집착증 환자처럼 대화에서도 끼어들고, 인물들이 음모를 꾸밀 때 엉뚱하게 헛발질을 한다든가 갑자기 키가 커진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끼어들면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앨리스 위주'로 가고자 한다. 반면 <세계의 끝> 주인공은 스스로가 '현관 매트'라고 할 정도로 동네북처럼 누군가에게 맞고 멱살 잡히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심지어 의지에 상관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다. 폭력을 당하지만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루키가 주목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이 아닐까? 게임의 룰이 바뀌면 정의도 바뀐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게임의 룰이자 옛 사회의 정의였다. 지금은 이웃을 등쳐먹고 이용하고 짓밟고 착취하고 속이는 것이 권장된다. 이런 것을 잘할수록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하루키의 작품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게임의 룰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저수지'는 어떻게 될까? 힘 약하고, 가난하고, 선량하고, 옛 게임의 룰과 정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폐허의 잔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끝에 버려지는 것이다. 그들이 바뀐 게임의 룰을 믿기 시작하면 전설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게임의 룰과 정의는 완전히 소멸한다.
목 자르기를 좋아하는 여왕의 자의적인 판단은 파이를 훔친 죄로 재판에 넘겨진 '잭'을 다루는 <이상한 앨리스>의 장이 <세계의 끝>에 등장하는 계산사의 '조직'과 기호사의 '공장'이 사실은 같은 주인의 오른팔과 왼팔일 뿐일 수 있다는 암시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종 빌런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그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강고한 실체를 이룬다는 점이 차이점일 것이다. 흰토끼가 허겁지겁 장갑과 부채를 챙기려고 한 까닭은 여왕에게 사형 선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정원사들이 흰 장미꽃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이유 역시 사형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왕의 사형 선고는 자의적 판단이지만 이미 시스템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을 강제한다.
내가 <세계의 끝>에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마치 '섹스 덕후' 같은 등장인물들의 지향점,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에 등장하는 섹스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박사는 주인공과 손녀(뚱뚱한 소녀)가 섹스를 했으면 하고, 뚱뚱한 소녀는 주인공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 도서관 참고문헌 담당 사서는 밥 한 끼 얻어먹고 나서 섹스를 하는데, '나는 아무하고나 섹스하는 여자는 아니에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섹스'라는 손가락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나의 결론은 '통찰력은 사랑의 뿌리에서 자란 새싹'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을 좀더 추구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사랑이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