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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Feb 01. 2021

당신이 나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군요

매일매일이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어제와 다름없이 흘러가야 마땅했을 오늘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에 엎드려 탁한 눈빛으로 이 영상 저 영상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다니며 피곤한 저녁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요란한 화재 경보음이 정적을 가로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오작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따분하고 지루한 화재대피훈련을 수없이 반복한 결과였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질 않자 슬며시 불안과 공포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불난 거면 어떡하지?

나는 얼마 전까지 스스로와 삶을 거래하던 사람답지 않게 신속히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현관문을 열었다. 적어도 불타 죽을 수는 없다는 장렬한 마음으로. 그리고 코를 찌르는 탄 냄새. 너무 현실적인 일이 갑작스레 일어나면 그 현실은 상상 속의 일처럼 두루뭉술하게 감각되기 시작한다. 정신이 혼몽 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게 현실이 맞나 의아해하며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119에 전화를 걸었다. 건물 밖에서 서성거리며 화염이 집을 집어삼키는 상상을 했다. 다 불타는 거야.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하나 둘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2년째 이 건물에 살면서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미쳤나 봐! 를 연신 되뇌며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여자, 씩씩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남자, 마스크도 없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뛰어나온 잠옷 차림의 여자……. 길 가던 사람들마저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 건물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멋쩍은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자기가 인덕션 불을 제대로 끄지 않아서 경보음이 울린 것 같다고 했다.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역시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나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군요? 나는 정말 깜짝 놀라서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나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어. 당연한 사실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그렇군요, 저는 괜찮아요.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과 처음으로 말을 나눴다.

그 사이 골목 안으로 작은 소방차 두 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건물에서 울려 퍼지는 경보음을 집어삼키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뒤이어 구급차 한 대와 경찰차 한 대가 따라붙었다. 구호복을 입은 소방대원들이 신속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내가 느낀 것은 경이로움이었다. 살아있다는 경이로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하게 무장한 소방대원들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영상 속에서만 보던 이들이 실존하는 것을, 나와 이리도 밀접하게 닿아있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실감했다. 같은 건물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 문제가 생겼을 때 달려와주는 사람들,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 마치 게임 속 캐릭터들이 현실세계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각자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나는 아무도 나에게 손 내밀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건 안다. 은연중에 이런 마음을 들킬 때면 가족과 친구들 모두 슬픈 얼굴을 하곤 하니까. 그런데 오늘 그 말도 안 되는 믿음의 어딘가가 강렬하게 부서졌다. 경보음이 울리고, 이웃들이 모이고, 소방대원들이 출동하는 이 일련의 장면이 나만의 세계 속에 웅크려있던 나를 슬며시 깨운 것이다.

'너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어. 네가 도움을 청하면 누군가 기꺼이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이제 그만 일어나.'

사이렌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이 슬며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큰 일은 아니래. 들어가자. 언제 모였었냐는 듯이 다시 제 갈길을 가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마지막 소방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불빛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2021.01.3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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