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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빈 Jun 13. 2019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 '나'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야기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우울감이 나를 덮쳤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 ‘나’가 없다는 생각에 매우 괴로웠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배고픈 이 순간에 무엇이 먹고 싶은지조차 생각해내기 어려운 사람이라니!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왜,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내 것’이 아닌 삶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었다. 내일을 상상할 수 없었단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그렇다고 죽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더욱 괴로웠던 건, 주변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는 사실이다. 모두 일단 앞만 보고 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르는 것 같았다. “다들 그러니까”가 대답이라면 대답이었다. 왜 우리는 고작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나다움’을 찾지 않는 건지, 찾지 못하는 건지 너무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집에서 나오지 않다가 우연히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발랄한 모습을 보면 위로가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아이들 덕분에 웃는 날이 생겼고, 그만큼 마음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주로 어른들이 무심코(혹은 일부러) 던진 말에 학생들이 상처 받고 좌절할 때였다.


넌 왜 그만큼밖에 못하니?  도대체 너란 애는 왜 그래?
커서 뭐가 될래?  네가 문제야.

슬프게도 아이들은 그 폭력의 언어를 체화하여 그것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듣기도 했던 말. 비로소 깨달았다. 이러한 어른들의 말이 ‘자기다움’을 지우길 강요하는 메시지였다는 걸,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는 걸.


2013년, 송도의 교육을 연구하면서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아이의 미래를 우려하며 내뱉으신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방과 후에 공부는 안 하고 운동장에서 축구나 하고 있으니 걱정이에요.” 난 오히려 자신을 즐겁게 하는 시간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던 그 친구가 부러웠다. 여전히 그가 그런 모습 간직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동안 부모와 사회가 바라는 가치 속에서 그 즐거움을 포기하는 연습을 해왔을 거라는 확신이 더 크게 든다. 이것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시나리오라는 것이 참 씁쓸하다.


나는 이제야 내 욕망과 목소리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결코 쉽지는 않지만 갈수록 ‘이 정도면 참 괜찮은 하루였어’하고 웃음 짓는 날이 늘어간다. 이건 내가 어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이제는 “그래서 뭐가 될래?”라던가 “대학 갈 때까지 참아”, “하지 마”라는 말을 들을 나이도 아니고, 설령 유사한 잔소리를 듣는다 한들 그게 나한테 큰 권력으로 작용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생이 망한다는 위협을 느끼지 않으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한때 아이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하는 많은 말과 행동이 얼마나 지독한 ‘갑질’인지, 폭력이 될 수 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내 삶에서 내가 사라진 연유를 고민할수록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곧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것에 대한 발견이기 때문인가 보다. ‘나’를 지우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나를 찾는 여정을 도와주는 어른이고 싶다. 또 우리도 아이였다는 걸 모두가 잊지 않도록 애쓰고 싶다. 그건 지금의 아이들과 앞으로 세상의 빛을 보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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