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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e Apr 26. 2018

단정하고 깊이있는

커피를 닮았네요


꾸밈없고 깊이있는 커피를,

그런 커피를 닮은 그를 좋아한다.


커피 향기를 맡으면 마음이 안정이 돼. 커피내려줘.

나는 커피 마시는걸 정말 좋아하지만 커피 맛은 잘 몰라. 하지만 당신이 볶고 당신이 내려준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것은 알지.




“어떤 일 하세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하는 질문이란 늘 뻔한것이지만 그 뻔함 속에서도 나와 통하는 어떤 공통점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것이기에 질문 하나에 신중을 기하고 대답 한마디에 귀 기울이게 된다.

2011년 여름, 협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그는 시끌벅쩍 한 손님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제주에서 쉬고 싶어 오픈하지도 않은 게스트하우스에 한달짜리 예약을 미리 해놓고 오픈하자마자 왔다고 했고 나는 게스트하우스의 스텝일을 모두 끝내고 육지로 올라가기전 지인이 오픈한 게스트하우스에 초대 받아 쉬러 갔었다. 이 남자는 말이 없는건지 말을 할줄을 모르는건지 목소리는 들을길이 없었고 하루종일 책만 보며 앉아 있었다. 진짜 책을 읽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볼때마다 늘 책을 보고 있었다.

너도 나도 친분을 만들려고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모습이 되려 유난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도, 그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그림자처럼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그와 나의 일행이 게스트하우스 거실 쇼파에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까지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울에서 카페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일행, 그러니까 나와 함께 제주 여행중이던 친한 동생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매니저 일을 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커피라는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저희도 커피 진짜 좋아해요. 제주에 여행을 오면 주위에 카페가 없어서 커피를 마시려면 멀리 가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마시러 가요. 근처에 카페가 오픈한다던데 조만간 함께 가실래요?" 이렇게 인사치례에 가까운 기약없는 제안을 하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늦여름, 그는 협재포구에서 신나게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고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개업한지 얼마 안된 카페에 가서 시원한 커피 한잔에 맛있는 컵케이크를 먹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가 왠일인지 같이 가자며 처음으로 우리를 따라나섰고 커피를 함께 마셨다. 그 이후에는 종종 셋이 커피를 마시러 가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함께 했다.


어느 날 게스트하우스에 자주 놀러오던 정은이라는 동네 초등학생이 쇼파에 앉아 쉬고 있는 우리 둘 사이에 앉았다.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

언니! 남자친구 있어요? 아니

아 그럼 둘이 사귀면 되겠네. 하더니 그의 손을 잡아 내 손 위에 얹어주었다. 그러더니 가지고 있던 볼펜으로 그와 내 손가락에 하트모양 커플링까지 그렸다. 그럼 이제 둘이 사귀는거에요! 하면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볼펜이지만 처음으로 커플링을 한것이니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을 하고 휴대폰으로 커플링이 그려진 그와 나의 손가락을 사진으로 남겼다. 재미있고도 묘한 경험이라며 함께 웃었다.

2011년 8월 정은이가 그려준 볼펜 커플링

며칠뒤 나의 숙소는 금능바다 초입의 아주 작은 오래된 민박집으로 바뀌었다. 바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쉽게 떠나지지가 않아 얼마간 제주에 더 머물렀다. 외계어 같은 제주 방언을 쓰시는 할머님이 하시는 민박집이었는데 민트색에 가까운 초록색 지붕과 민박집 거실의 나무 마루며 마당에 곱게 펼쳐진 금잔디가 너무 마음에 들어 여행 올 때마다 언젠가 저기에서 꼭 지내봐야지 했던 곳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할머님의 안내로 나는 그 민박집의 가장 작은 방을 쓰게 되었다. 도로가에 붙은 방이었는데 오가는 사람이 넘어 들어올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창이 낮아 첫날에는 지나는 취객의 발걸음 소리에 잔뜩 예민해져 잠이 오지 않았다. 늦여름의 더위로 창문을 닫을수도 없어 조금 열어두었는데 그 덕에 모기에게 다리를 잔뜩 물렸다.     


며칠뒤 시장에서 사왔다며 고구마를 한봉지 들고 민박집 앞에 그가 나타났다. 할머니께 주방을 쓰는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고구마를 삶았다. 따끈하게 잘 익은 고구마 몇 개를 할머니께 나눠드리고 투명한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 마당에서 삶은 고구마와 캔맥주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왜인지 그날의 하늘과 바다빛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어느덧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회사도 그만둔데다 오랜시간 제주에 머무른것을 알게 된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명절에는 집에 가야지, 하는 마음을 먹고 김포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가게 되었다며 그에게 인사를 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서울로 올라가기전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와의 만남을 피했다. 그때의 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시기라 그 누구와도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특히 이성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자꾸 궁금했는데 정작 할말이 있다고 만나자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났던 것 같다. 기어이 그 날 밤이 왔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능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말했다.

"우리 한번 만나볼래요?"

아이고...올것이 왔구나. 왜 그랬는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Yes도 아니고 No도 아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여기 제주 말고요. 나중에 결정하죠. 여행지에서 생긴 감정은 거짓일때가 많아요. 여행을 끝내고 올라와 현실에서 만나보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감정이 들면 그때 결정하는걸로 해요"

지금 생각해도 풉, 하고 웃음이 나지만 각자의 가까운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던 우리 두 사람에게는 더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어쩌면 신기에 가까웠던 정은이의 볼펜 커플링 신공 때문이었을까. 이후 우리는 육지에서 어색한 만남을 시작했고 먼 미래까지 함께 고민할만큼 급격히 가까워졌다. 함께 커피를 내려마시고, 집 근처의 궁금한 카페도 함께 갔으며, 좋아하는 커피의 맛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그즈음 생각했다.

어쩌면 커피를 닮은 이 사람과는 오래도록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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