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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 Jan 16. 2024

너희는 절대 이혼하지 마라 5

Get out the comfortable zone ! 

'청색증'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심각하다는 것을, 얼마나 당황했는지 119를 부를 생각도 못했고 무작정 아이를 안고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렇게나 울던 아이는 이제 힘이 없이 축 늘어져있는 데다가 여전히 입술은 보라색이어서 응급실로 가는 내내 울며 벌벌 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너무 다행스럽게도 진료를 보게 되니 혈색은 돌아왔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결심했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야 아이도 지킬 수 있겠구나...'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마도 "고생하고 수고했어, 그런데 운전면허부터 따" 일 것이다 


  이 것은 먼저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성인이 된 후 운전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을 때에는 면허를 취득하는데 시간을 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고 대중교통이 편리한 이상 운전이라는 것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출산을 하고 난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운전이 절실했지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기가 애매했기에 늘 우선순위에서 밀어놓고 있었다.  정말로 '위급상황'이 닥친 후에서야 최우선 순위로 올리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해 내야만 긴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고, 그런 능력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때서야 비로소 결심을 한 것이다. 


면허 시험을 보겠다고 선언 한 뒤 전남편이 한 말은  "네가 면허 따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였다  


  그는 언제나 나를 아래로 보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오기가 생겨버렸다. 가스라이팅을 탈출하게 된 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필기시험을 보고 학원 등록을 마쳤다.  당시에는 시험 자체가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다. 이른바 MB면허로 빠르고 쉽게 면허를 취득했다. (물론 도로주행은 한 번 낙방했다) 그리고 바로 동생의 도움을 받아 도로연수를 시작했다. 속전속결로 시내 주행과 고속도로를 모두 섭렵한 뒤 바로 차를 계약했다. 내가 번 돈으로 구매하는 첫 차였는데 당시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아 차량 보험료를 낮추기 위해 전남편의 이름으로 계약을 진행했었다. 이는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당장의 보험료를 낮추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재산 분할 할 때는 큰 손해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자가용이 생겨버린 후 나는 정말 훨훨 날아다녔다. 차가 없어도 아이 둘을 데리고 온갖 곳을 다녔는데 기동력이 더해지니 이제 그 범위가 전국구가 되었다. 부산, 남해, 여주, 거제, 강릉, 속초, 전주, 영광, 태안, 제천 등 정말 구석구석 아이들과 다녔다. 보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지는 것은 정말 큰 자산이 된다고 생각한다. 늘 익숙한 나의 comfortable zone에 안주할때 느끼는 것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안락함이지만,  내가 모르는 uncomfortable zone은 늘 설렘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하다. 나는 이것들을 아이들에게 몸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아직 어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느낀 호기심과 즐거웠던 감정들이 자양분이 되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대부분의 여행에 전남편은 참여하지 않았다. 본인의 일이 바쁜 것도 있겠지만 쉬는 날이면 그는 집에서 쉬고 싶어 했고, 여행을 따라나선다 하더라도 숙소에 들어가면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나가자고 보채는 아이들은 늘 내 몫이었기에 나 역시 그가 여행에 함께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심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를 제외한 우리 셋은 재미있고 행복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가족 단위로 단란하게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다른 것이니까, 나의 행복은 다른 형태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다가 나는 아이들과 일본에 있는 친척을 보러 갈 일이 생겼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에게 보석과 같은 아이들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일본 여행을 계획하면서 내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4살 아들과 돌이 갓 지난 딸, 그리고 나. 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순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감정 속에서 전남편의 가스라이팅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일본 여행에 앞서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일주일간의 일정을 잡았다. 그동안에도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그러나 전남편은 그런 나의 기쁨과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알 수 없도록 투덜대는 말투, 아이들과 일주일간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도 아쉬워하지 않는 얼굴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당연하게 그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해 보았지만 그는 일 때문에 못 간다고 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함께 안 가서 삐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출국 전 날,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강 건너 불 보듯 하였고 나는 그 태도에 화가 났다.  


"아니, 적어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뭘 해달라고 부탁한것도 아니고 본인 일정 때문에 같이 못 가는 걸 왜 나한테 짜증을 내는지 이해 못 하겠네. 보통 남편들이라면 공항까지 라이딩을 해주던지 아니면 잘 다녀오라고 차비라도 줄텐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왜 짜증만 내는지 모르겠어"  


화가 났던 건 사실이다.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그는 말과 태도 모두가 좋지 않았다. 투정 부리듯 내지른 말에 돌아오는 답변은 나를 넘어섰다.  


"너 놀러 가는데 내가 돈을 왜 주냐?" 


"아이들 보여주러 친척집에 가는 거야. 두 아이들 데리고 비행기 타는 거 힘들겠다고 생각 안 해봤어? 걱정은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비행기 타면 알아서 척 공항에 내려줄 텐데 뭐가 힘들어? 넌 고생을 안 해봤구나"  


"하.... 그만하자. 기분 망치지 말고"  



  그의 입장에서는 나는 아이들과 '놀러' 가는 거고 본인은 '일'을 하며 고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물론 그는 일본행에 십원 한 장 보태주지 않았다.)  그의 말은 내 기쁨을 훔쳐갔을 뿐 아니라 내 마음속에 분노와 상처가 쌓이게 만들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기대와는 상반된 말들로 가득 찬 전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도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의 말이 무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으로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살아가는 동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설레는 일본행, 짧으면서도 긴 여행기간 동안 그 모든 것을 잊고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간간히 남편의 안부를 묻는 친척들 말에 일이 바빠서 함께 못 왔다고 겉치레하며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먹여주고, 즐기게 해 주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얼굴만 보아도 모든 근심이 사라질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매우 불편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남편이라는 그 인간은 일주일 내내 어떠한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거나 걱정되지는 않는 것인가? 과연 이 사람은 부모로서의 자각은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과 서글픈 감정들은 차곡차곡 적립되어 갔다.  Eric Clapton의 <Change the world>를 듣고 있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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