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찬 마그마 방
Eric Clapton의 <Change the World>를 듣고 있던 그날, 나의 세상은 바뀌었다. 평범했던 여느 날과 같았지만 인생의 길이 바뀐 슬프고도 특별한 날이었다.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 도저히 빠지지 않는 뱃살과 더불어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던 나는 어느 날 문득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사실 다이어트를 결심한 것은 인생을 통틀어 수도 없이 많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그때만큼 집중해서 꾸준히 운동과 식이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이어트의 목적도 있었지만 오후 3-4시가 되면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싫었고 체력을 기르면서 살도 빼보자는 결심에 운동을 시작했다.
'3개월만 해보자'
운동 등록기간 딱 3개월만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첫 일주일이 가장 힘들었고 삼주차가 되었을 때는 꽤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스스로와 약속한 3개월을 꽉 채우고 나서는 체력이 상당히 좋아졌고 더불어 살도 빠지고 피부도 좋아졌으니 당연히 신이날 수밖에.. 그렇게 나는 2년 동안 운동을 했고 체력과 다이어트 모두를 이룰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바프(바디프로필)도 2015년에 찍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당시 나는 상당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무 옷이나 걸쳐도 잘 어울리고,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행복해했다. 체력이 좋아지니 일하는데 능률도 좋았을 뿐 아니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꼼꼼하게 챙겨서 주변에서는 '슈퍼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던 터였다. 운동이 꽤나 적성에 맞았던지라 티칭 강사로 전향하여 일을 하고 있었고, 여러 매체에서 섭외가 들어올 정도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좋게 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남편이다.
추후 그의 따르면 내가 예뻐지고 돈도 잘 벌고 잘 나가니 불안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물론 핑계 중의 하나 일 뿐이지만 그것이 본인의 의심과 폭력, 폭언이 정당화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한 사람만 빼고
여느 때와 같았던 그날, 나는 스마트폰으로 (남자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웃긴 짤 공유 좀 부탁' '맡겨놨냐? 돈 내라'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원래 그런 이야기들이 소소하게 재미를 가져다주다 보니 대화창을 보며 피식 웃고 있었다. 그때 그는 휴대폰을 빼앗았다. 당시 우리 사이는 꽤나 냉랭했던지라 대화를 최소화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음악을 듣고 휴대폰을 보며 웃는 내가 아니꼬웠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모든 것을 스크리닝 하기 시작했다. 과거 대화 내역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는 대상이 '남자'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핀트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곧 모든 대화창을 검사했고 '남자' 거래처사람 이던지 '남자' 동료, '남자' 담장자 라던지 심지어 로맨스 스캠으로 마구잡이로 날리는 '남자' (인지 여자인지 확인도 안 되는) 스캐머들의 메시지 모두를 바람피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잘 정리하지 못한다. 누구와도 주고받은 메시지를 (스팸이라 할지라도) 지우지 않고, 사용하는 앱들은 늘 백그라운드에 놓여있는 데다 백업은 성실하게 하고 있어 스르륵 보면 지난 수년간의 과거가 주르륵 나올 만큼 투명했다. 일정들은 캘린더에 빼곡히 적혀있어 무언가를 숨길 것은 없었지만 살을 빼고 난 후 달라진 모습과 활동 반경을 보며 불안의 씨앗을 심은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캘린더에 적은 일정은 본인을 속이려고 그랬다던가, 대화창을 지우지 않은 것도 무언가를 숨기려고 남겨두었다던가 말이다. 병적으로 휴대폰을 뒤지던 그에게 돌려달라고 말했지만 증거를 잡아야 한다며 막무가내였다. 눈팅하는 커뮤니티라던지, 카페, 소셜네트워크까지 뒤지면서 내 글에 댓글 다는 남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보며 이 놈 새끼도 만나냐고 물어봤으니 말 다했다고 본다.
화가 났다. 아니 화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동안 차곡차곡 적립해 오던 그에 대한 서운한 감정들과 그동안 몇 번 있었던 이혼할 수 있었던 기회를 묻어두고 아이들의 엄마로서, 그리고 부인으로서 맡은 역할에서 충실하게 그 몫을 수행하던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부정한 여자 취급이라니! 이미 꽉 차버린 마그마 방이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지는 것처럼, 분노의 화산은 터져버렸다.
더 이상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뭐라고 하든,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가 열심히 휴대폰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손에서 폰을 다시 빼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동시에 나는 2미터 이상을 나가떨어지며 가구에 머리를 박았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어버렸던 것이다. 이미 분노가 극에 달한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방으로 도망가는 그를 쫓아갔는데 반박자 늦었나 보다. 분명 발과 방을 향해 몸을 넣었는데 절반만 들어간 순간 그는 있는 힘껏 문을 밀어버렸다. 가슴이 압박되니 고통이 찾아왔다. 숨 쉬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힘이 내 몸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고통에 못 이겨 흐느끼며 소리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죽기 직전일 것 같았던 그 순간 그는 문을 확 열어버렸고, 문을 열려고 애쓰던 나는 관성에 의해 방 안으로 넘어면서 침대에 어깨와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 순간 전남편은 협탁에 있던 내 차키를 가지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너무 아파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나는 해야만 했다. 안전하지 않은 이 집에서 다시 찾아올 폭력을 대비해야 하기에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