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위에서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경찰들이 찾아왔다. 이때는 여청과(여성청소년 범죄과)가 운영되고 있던 터라 첫 번째 경찰신고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것을 명기시키면서 가해자에 대해서 접근금지도 신청할 수 있었다. 경찰들에게 상해 부위와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여주고 있었을 때 우물쭈물 그가 들어왔다. 상황이 커졌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미안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시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에게 거실을 내어주었고 나는 문을 잠근 채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르는 그 사람을 밤새 두려워하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고 무심할 만큼 또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온몸은 쑤시듯 아파왔는데 거울을 보니 팔다리에 상당한 멍이 들어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고 발목과 손목은 시큰거렸다. 세 번째다. 그가 폭력을 휘둘렀던 것은. 고작 몇 시간 전의 혼돈이 나를 괴롭혀왔고 동시에 먼 과거의 일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병원을 가 진단서를 발부받았다.
집안 분위기는 북극 한파 못지않게 냉랭했던지라, 아이들은 당분간 친정에서 지내게 했다. 당장 고성이 오가지 않더라도 꽤 성장한 아이들은 그 분위기를 쉽게 눈치챌 테니 나름 조치를 취한 것이다. 낮에는 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와 꽤 많은 이야기(라고 말하기엔 언쟁)를 나누곤 했다. 이미 나는 마음을 굳힌 상태였는데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시 미친 거라며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며 이번 한 번만 참아달라고 말하였지만 지난 세월 내가 참았던 순간들, 서운했던(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큰 상처) 일들을 말하며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답했다.
본인이 잘못했다면서 용서를 구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또 버럭버럭 화를 내며 네 잘못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또 미안하다 사과하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 욕을 바가지로 하고 다닌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야, 쟤네들 내 새끼들 맞냐?"
언쟁이 심해지니 그는 해서는 안될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이 말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누가 보아도 친탁으로 본인의 유전자를 뿜뿜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망상에 사로잡혀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다니! 태어나서 가장 서럽게 울었던 날이다.
그렇게 그는 잠시 본가로 갔다. 일단 서로 진정하자는 의미도 있었고, 그 말 이후 내가 죽을 만큼 괴로워하니 잠시 떨어져 있기로 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친정에서 데리고 왔다.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별거를 시작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에게 연락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내 집인데 왜 내가 나가있어야 하지? 애들이랑 네가 사는데 관리비는 왜 안내?"
"난 들어갈 거니까 같이 있기 싫으면 네가 나가던가"
대꾸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쏟아내며 그는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접근 금지가 되어있는 상태인데도 매우 위풍당당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를 피해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도망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그는 약 올리듯 메시지를 보냈지만 (통신 접근금지는 신청하지 않음) 며칠이 지나고 나서는 이야기 좀 하자며 불러냈다. 이미 수 십 번의 패악질에 이골이 난 터라 그를 집에서 만나고 싶지 않아 인근 커피숍으로 불러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별거 생활이었지만 본인도 나름 불편했을 터, 화해를 제안해 왔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 찾아온 세 번째 이혼의 기회였기에 함부로 흘려보내기 싫었다. 별거를 하는 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태도 거기에 더해 당당하게 '내 집'이라며 나와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행태는 참아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아빠가 없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게 하긴 싫은 양가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그를 만나러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