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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Oct 07. 2024

생의 첫 가을 운동회

아름다운 추억은 기억의 기록을 통해.....

1975년 10월 7일(월요일), 날씨 맑음.


초가을이 달포나 지나 날씨가 제법 쌀쌀할 법도 한데,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부터 부산하다. 올해로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지 벌써 삼 년이 지나서인지 혼자 농사일을 꾸려온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시골 아낙네에게 주어진 가련한 운명에 대한 순응인지, 아니면 어린 일곱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생존에의 절박함인지 어린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새벽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하기만 하다. 오늘은 분교를 다니는 1학년인 내가 4학년인 누나가 다니는 본교로 가을 운동회 가는 날이다.


조상들이 대를 이어 가파른 산골짜기를 깎아 개간해 놓은 집 앞 다랑이논의 벼들은 여름 내내 시끌거리던 매미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산골 마을의 살구나무와 앵두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앏은 잎을 물들이며 야금야금 가을을 재촉하자, 영글어 가는 벼나락도 제 무게에 못 이겨 하루가 멀다하고 고개를 떨구고들 있다.


찬 새벽바람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샛별들을 쫓으며 산간 오지의 까탈스런 계곡을 타고 오다 개울을 포근히 뒤덮고 있던 목화솜 같은 물안개를 사뿐히 걷어내고서는 논두렁에 다다랐다. 옆집 이장 집 담자락에서부터 우리 집 장독대로 이어지는 넉넉히 휘어진 나지막한 돌담길에는 이 가을을 깝쳐온 코스모스가 벌써 하얀색과 진분홍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능구렁이 같은 이 실바람이 이내 좁다란 마을 길로 숨어들어 이슬 젖은 이 여덟 꽃잎들을 살갑게 흔들어 대자, 새벽잠 자던 고추잠자리들도 놀라 가을 하늘의 어디론간 날아가 버린다.

몇 달 후면 동짓달이 올빼미 우는 소리 흘러나오는 이 깊은 산 속의 밤하늘 위로 떠오를 것이다. 예년처럼 날센 강바람도 섬진강변의 첫눈 맞은 소나무 숲 속을 휘젓고는 이 산골로 어김없이 덮쳐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정도의 소슬바람이야 이 골짝 사람들에게는 곧 다가올 엄동을 미리 알려주는 애교스러운 전령(傳令)에 불과할 뿐이다.


이 깡촌에는 도회지의 그 흔한 박하사탕 같은 과자 파는 점방조차 없다. 뒷산 밤나무 밭에서 따 온 햇밤이나 고동골 마을 어귀에서 세월을 힘겹게 늙어 온 감나무에서 따온 단감 정도가 오늘 운동회에 가져갈 수 있는 우리만의 군것질거리이다. 다행히 썩은 감자를 모시로 싸서 으깨 쌀가루에 사카린과 베이킹 파우다를 넣어 부친 개떡이나 추석성묘 후에 아껴 놓은 위와 아랫동이 살포시 깎여 나간 색바랜 사과까지 운동회의 점심으로 챙겨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나은 호사는 없다.

남해 바닷가 포구나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땅 어촌에서 들여오는 도톰한 파래김으로 김밥을 쌀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김은 찬거리가 부족한 겨울 시골 저녁상에 가끔 식구당 한 장씩 나눠, 간간이 지푸라기를 발라가며 아껴서 왜간장에 찍어 먹을 정도의 귀한 반찬이다. 더더욱 김밥을 먹어 본 적 조차 없는 시골 꼬맹이들의 운동회 따위에 이런 귀한 것으로 김밥을 싸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골 아지매들에게는 고명으로 들어갈 계란지단, 쏘세지, 어묵 그리고 간해 볶은 쇠고기 같은 고급 식재료를 구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철마다 징그럽게 돌아오는 농사일만으로도 버거운데 일일이 아궁이 불에서 소소히 이런 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연탄 쓰는 도회지의 아줌마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운동회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어머니가 호롱불 끄다 말고 뜬금없이 나에게 "내일 운동횐데 니 달리기 하마 현조한테 이기것나?" 라고 걱정스레 물어오자, "어매, 함 바라, 내가 금마한테 질줄 아나? 참말로...." 라고 약간 떨리는 입술로 대답해 버렸다. 같은 동네 사는 동갑내기 외사촌 현조와 분교 등교길에 달리기 내기만 하면 늘 지는 것을 숨겨 왔던 나였다.


어머니는 “아 참 그라고, 니 있재, 내일 운동회 때 식구들이랑 같이 달리기 하는 기 있을끼다. 혹시 아부지라고 적힌 종이가 걸리마, 삼화실 아재한테 부탁해 놓을 테니끼네 그 아재 찾아가꼬 같이 달리면 된다이, 알것제?”, 라고 당부를 했다. 그런 요상한 달리기를 처음 들어 본 나는 작년 운동회 때 막내 누나가 공교롭게도 그 "아버지" 가 적힌 종이 쪽지가 재수없이 걸려버려 허둥댔다는 어머니의 말꼬리 흐리며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를 듣고서는 잠들고 말았다.


운동회 아침, 철마다 남도지방을 도는 장돌뱅이 짐꾼들에게서 사둔 박카스병에 담긴 동백기름을 어머니는 안방 오동나무 궤짝 속에서 꺼내 머리에 곱게 바른다. 참빗으로 양쪽 가르마를 타내고 어머니의 시집살이와 늘 함께 한 홈 파인 빛바랜 은비녀를 단아히 말아 올린 쪽 찐 머리에 꽂고 무궁화 문양이 들어간 몸빼로 갈아 입은 모습이 평소 어머니와는 사뭇 다르게 고와 보인다. 머리엔 따발이를 하고 점심 보따리를 소담스래 챙겨 이고 막 네 살 난 막내의 손을 붙잡고 집을 나선다. 누나와 나도 운동회 소품으로 쓸 오재미랑 양철 도랭이를 챙겨 들고 설익은 돌배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초가집 사립문을 뒤로 하고 마을 어귀로 향한다.

오른쪽이 어머니와 필자의 유일한 어릴 적 사진

어느덧 동네 어르신들이 또래 친구들을 데리고 삼삼오오 본교로 이어지는 시골 산길을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아침 인사를 나눈다. 원래 본교로 향한 길은 외롭고 단초로워 풀만 무성히 자라 소달구지나 고라니 같은 들짐승들이 풀꽃 내음 가리며 지나간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고갯마루와 지평선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그 한적한 길이 간만에 북적이기 시작한다.


산골에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대청마루에 어렵사리 장만해 걸어 놓은 태엽을 돌려야만 가는 불알 벽시계 이외에 딱히 없다. 하지만, 평생을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살아온 어머니는 달 갈이 할 때마다 넘어가는 구재봉 산꼭대기에 홀로 서있는 외솔나무 가지 위에 걸린 달무리나, 가을 노을이 산 넘어가며 비워진 자리에 땅거미가 부지런히 드리워지는 모양새나, 혹은 매서운 북새바람에 흔들리는 별빛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시간을 가늠해 알아 맞혀낸다.


하여, 부지런히 걸으면 운동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라 직감한 어머니는 급한 마음이 걸음보다 앞서 우리의 늦은 걸음을 보챈다. 그 목소리에 놀라 수수밭에서 주인 몰래 익어가는 수수를 쪼아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던 까투리 녀석들이 겁에 질려 회갈색 날개를 푸닥거리며 부리나케 도망쳐 버린다.


면 소재지에 본교가 있다고는 하나 워낙 두메산골이라 1-2학년 어린 학생들을 15리나 되는 거리를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고을 유지들의 뜻과 당시의 새마을 운동 덕택에 집과 본교 사이에 교실 두 개짜리의 분교를 세워 놓았기에 등교하기에는 나름 편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어린 아이의 잰걸음으로 본교까지 걸어간다는 것, 게다가 변변한 배신 운동화 한 켤레 없이 검정 고무신으로 울퉁불퉁한 시골 돌길을 다부지게 오르락 내리락 걷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고역이다.


더군다나, 운동회는 으레 본교에서 열리기 때문에 갈개꾼같은 본교 동급생 녀석들이 본 적도 볼 일도 없는 우리를 분교에서 내려온 촌놈이라 어쭙잖게 놀려 댈 거라고 누나가 겁주듯 추석 전부터 귀띔을 해줬다. 그래서 일까? 그 어린 나이에도 나름 존심은 있어 그 녀석들 눈꼴 사나운 꼬락서니를 봐야 하니 본교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경품으로 받을 지 모를 지우개 달린 연필이나 공책, 그리고 왁자지껄한 운동회 잔치 분위기만 아니라면 본교까지 그 먼 시골 에움길을 어머니 손잡고 따라 갈 리가 없다. 차라리 내 애완소 누룽이를 들판으로 끌고 나가 소풀이나 먹이고 개울가에서 저녁 찬거리로 다슬기나 잡는 것이 속편할지 모른다.


아무튼 잰걸음으로 거의 한 시간 반을 걷다 보니, 일제 강점기 때 시멘트 블록으로 세워졌다는 면에서 유일한 이층짜리 본교 건물이 맑게 갠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 펄럭거리는 만국기들 사이로 그 웅장한 자태를 아른아른 드러내기 시작한다.

본교 정경

사실, 운동회에 기필코 외사촌을 꺾어 1등을 해서 공책이랑 지우게 달린 6각형 '문화' 연필을 받아야겠다고 다부지게 내심 다짐한 나였다. 하지만, 막상 본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외사촌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험악해 보이는 본교 녀석들이 제집 앞마당인양 까불랑거리며 운동장 여기저기를 뛰돌아 다니고 있다. 덜컥 "와 임마들 장난 아니네, 야들한테 달리기 해 지마 우짜노, 꼴찌라도 하면 우짜지....?" 하며 콩알만 한 심장이 팔딱거리기 시작한다. 벽지 섬마을 촌놈이 처음으로 서울역에 온 것마냥 나는 누룽이보다 더 큰 눈으로 그저 두리번 두리번 정세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곧이어, 큰 미루나무 높은 가지에 뎅그러니 매달린 두대의 확성기를 통해 쌍방향으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신나는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다. 호루라기 소리에 맟춰 "하나 둘, 셋 넷"을 목청 높여 외치며 청군과 백군 머리띠를 쟁여 메고서는 눈썹에 힘주고 일사분란하게 줄을 맞추고 있는 본교 애들과는 달리, 원정 나온 분교 꼬맹이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확성기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르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벽촌 분교의 손으로 치는 학교 종따위는 감히 그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이 첨단 문명의 이기(利機)는 천지개벽과 같은 것임이 틀림없다.


운동장 한구석 멀찌감치서 동생을 업고 당신의 둘째 아들이 쫄지 않고 운동회 행사를 제대로 잘 따라 하는 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던 어머니와 내 눈빛이 딱 마주친다. 입학 전부터 겨우내 부스럼을 앓고 감기 떨어질 날 없어 콧물만 흘려대 입술마저 헌 코흘리개인 나였다. 그런 아들놈이 눈치껏 따라하는 모습을 보고 애비 없이 키워도 당신의 눈에는 나름 대견스러워 보였을까?


여름내내 밭일로 그을렀던 어머니의 구릿빛 얼굴에서 이내 흐뭇한 실웃음를 지으며 가는 잔주름을 입가에 자아낸다. 이 운동회가 끝나면 곧 닥쳐올 벼타작 걱정에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을 터인데, 그런 누구와도 나눈 적이 없는 당신만의 철마다 따라다니는 근심을 오늘따라 나로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찾아보고 싶지도 않다.


이윽고, 처음 보는 면장님의 걸걸한 격려 말씀와 교장 선생님의 개회사, 그리고 6학년 청군과 백군 대표 형들의 선수 선서가 끝나기가 무섭게, "따~당~~" 하고 화약총의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폭약 소리가 가을 창공에 울려 퍼지면서 내 생의 첫 가을 운동회의 화려한 막은 그렇게 올랐다.

당시 70년 중반의 운동회 모습

그로부터 에누리 없이 정확히 50년이 지난 오늘 이 가을날...


밉상 동생의 둥개질 하는 소리도,

누룽이의 그 고느적한 울음 소리도,

분교 뜰에 울려 퍼지던 상큼한 풍금 소리도,

모깃불 위에서 희나리 타들어가며 튀는 소리도,

여름 내내 시종일관 조잘대던 매미 그 울음 소리도,

깊은 두메산골 계곡 속 실개천 맑게 도란거리던 소리도,

어머니의 4분의 2박자의 흥얼거리던 뜻 모를 자장가 소리도,

청군 백군 이겨라고 목젖 세우며 터져라 응원했던 그 응원가도,

가을 하늘에 고막 찢어질 듯 울려 퍼졌던 운동회의 화약총 소리도,

맨해탄의 마천루의 어디를 뒤집어 봐도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그 고향 내음 나는 소리들을 들을 수는 없다. 이제는 듣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만의 애잔한 전설이 되어 마음 속 소리샘에 아련히 남아 버렸을 뿐이다.


간간이 사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도심을 가르는 요란스런 엠뷸런스 소리, 퇴근길을 보채는 차들의 날카로운 경적 소리만이 촘촘히 박힌 빌딩 사이 유리창을 뚧고 이 중년의 귀에 거슬리게 들려 올 뿐이다. 오늘 이 가을날도 인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는 이 거대한 탐욕의 도시를 지나는 허드슨 강의 물살보다 빨리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기나긴 당신과 함께 했던 그 질곡의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흘러가 버리듯.....

후기:

내 어머니 잠들어 계신 고향의 무덤가에는 지금쯤 가을 된 서리를 맞으며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할미꽃이 함초롬 아름드리 피어있을 겁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절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의 추억입니다. 어릴 적 기억의 편린들을 조금씩 모아야 할 나이가 되면 어느듯 그 기억은 추억이 됩니다.


그 추억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했을 때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저처럼 발달 자폐 장애 아들을 둔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이 그런 기억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것을 표현하지 못 할 뿐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저도 그 표현을 도와 내 아들이 저와 같이 부모에 대한 아련한 기악을 추억으로 만드는 그 날이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작지만 일상의 소중한 '기억'은 삶을 지탱케 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큰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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