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유열의 음악앨범', '힘을 내요, 미스터 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 아닌 시대상 배경에 대한 스포일러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최근 들어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의 개봉이 늘었습니다. 과거 그 시절을 다루는 영화가 웃음 혹은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다면 최근 영화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추모의 의미가 더해지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최근 영화들의 새로운 변화로 보이는데요. 제가 할 얘기는 특정 시대 혹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에 대한 얘길 해보려고 합니다. 개봉작부터 개봉 예정작까지 다양하며 벌써부터 찬반양론이 올라온 작품도 있습니다.
하루 차로 공교롭게 1994년을 소재로 만든 영화 두 편이 연달아 개봉되었는데요. 정지우 감독의 '유열의 음악앨범'(Tune in for Love/1994)과 김보라 감독의 '벌새'(House of Hummingbird/2018)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1994년을 주축으로 했지만 1994년은 나열된 시기중 하나였고 사건을 나열하기보다는 시대의 히트곡을 나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PC통신의 세대라는 부분에서는 '접속'을, 첫사랑의 아픔은 역시 같은 명필름이 제작한 '건축학개론'이 떠올랐고 아기자기한 사건들과 음악의 나열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KBS Cool FM(음악 2FM)의 장수 프로그램의 하나였고 다양한 음악들이 활용되었습니다. 이런데에는 실제 '유열의 음악앨범'의 매인 작가로 활동한 작가진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벌새'는 1994년의 시기로 못을 박고 한 소녀의 좌절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데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대상을 반영한 사건은 두 개였습니다. 김일성의 죽음과 성수대교 붕괴였죠.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성수대교 사건은 가물가물하지만 김일성의 죽음은 중학교 시절 뉴스로 접해서 기억났고 영화 속에서처럼 서울대를 강요하는 선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생들을 무시하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나서 공감이 되더군요. 깡통들이라며 무시하던 영어 선생님, 단지 리코더를 못 불러서 주저하고 있을 뿐인데 제 뺨을 때리셨던 음악 선생님도 떠오릅니다. 물론 영화 속 한자 선생님처럼 좋은 분도 계셨지요.
문제는 세 번째... 개봉 예정인 이계벽 감독의 '힘을 내요, 미스터 리'(CHEER UP, MR. LEE/2018)인데 당초 코미디 영화로 홍보된 이 작품은 실제 뚜껑을 열어보면 후반 휴먼 드라마로 전환되는데요. 모티브로 삼은 사건이 2013년 대구지하철 사건입니다. 근데 이 영화는 개봉 전 시사회에 찬반양론이 많았고 비판에 관한 부분과 관련해서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7번 방의 선물'보다 최악이란 얘기도 나오더군요. (참고로 저는 이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극 영화를 평가할 때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인데 이 중 '벌새'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고 나머지 영화는 별 넷(볼만함) 정도의 점수를 주었는데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결국 반 개를 빼버렸습니다. 하지만 실화 모티브를 담지 않은 영화보다는 낫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일단 저 역시 장애인 비하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실제로 장애를 가진 분들을 많이 만나보고 절친 분들도 계시다 보니 이런 분들을 비하한 장면을 보면 화가 나더군요.
하지만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장애에 대한 이유가 확실하고 그 부분을 다룸에 있어서 장애인을 비하할 이유는 없었다고 보였기 때문이죠. 휴먼 영화로써의 재미와 적어도 대구지하철 사건에 대한 나름 추모의 예의는 지켰다고 봤기 때문이죠. 같은 관점에서 육상효 감독의 '나의 특별한 형제'(Inseparable Bros/2018)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돈 워리'(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2018)도 인상적으로 본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대구 지하철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호재 감독의 '로봇 소리'(SORI: Voice from the Heart/2015)나 세월호 사건의 후유증을 이야기한 이종언 감독의 '생일'(Birthday/2018)을 나름 인상적으로 본 이유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물론 웃음을 유발할 곳에서는 적당히 유발하되 사건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는 예의를 지켰다고 느꼈거든요.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스터에는그려진 무너진 다리라는 힌트에서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면 이 영화의 모티브가 성수대교 사건을 직감하실 것입니다.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철수(차승원 분)가 지하철 지하도로 향하는 것을 주저하는 부분을 초반에 보여주지만 그것이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을 후반에 등장시키며 그가 지적장애를 가지게 된 사연을 보여줍니다.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그리고 이것을 어떤 장르에 녹아내리느냐에 따라 느낌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건을 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에서는 크게 공감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특정 사건을 딱 잡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시발점으로 작용시키거나 수많은 시대상 중의 하나로 묘사하는 '유열의 음악앨범'의 사용 방식이 더 안전할 수 있다고도 보입니다. tvN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타이틀은 특정 연도지만 그 시대상으로 그치지 않고 점점 시대 흐름을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구지하철, 세월호,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의 아픈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습니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개봉될 때 아직 시기상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고 저 역시도 일부 영화는 비난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각본가나 감독 스텝, 투자사들의 마음을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저들이 정말 예의를 지켜 그들을 추모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들은 적어도 생각을 하고 만들겠지만(물론 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투자사나 제작비를 지원하는 곳의 입장에서는 어느 장면을 극대화시켜야 돈이 되고 흥행이 되는가를 고민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을 비하하고 추모할 자세가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냉정하게 이들 영화를 심판하겠죠.
어떤 분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면 위로이지만 영화가 허접하다면 그것은 관객을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어쩌면 최근 '벌새'를 비롯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보고 나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다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