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크리스마스 영화가 아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여유로운 마감을 기대했지만 뜻밖의 상황과 마주했습니다. 뒤숭숭할수록 생각해야 할 것들이 바로 이 연말이 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탄절은 늘 캐빈과 함께 하셨지만 오늘은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봅니다. 하지만 다시 얘기드리지만 이 영화는 성탄절을 기념하는 특선 영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데 배경은 성탄절 전후라는 아이러니의 영화들이죠.
1985년 아일랜드의 어느 소도시. 까마귀가 우악스럽게 울어대는 이곳에 석탄 영업소를 운영하는 빌의 모습이 보입니다. 재투성이의 아이에게 동전을 쥐여주고 (아이아버지는 주정뱅이) 회사 직원들에게 보너스도 듬뿍 주는 천사가 따로 없는 사람이죠. 무뚝뚝해도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이고요. 석탄 자루를 가득 실은 그의 노란 트럭은 여러 거래처를 돌고 있죠. 수녀원도 그중 한 곳입니다. 어느 날 울부짖는 소녀 레드먼드를 발견한 그는 집으로 도착해서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섯 딸과 아내 아일린과의 평범한 삶은 성탄절을 앞둔 며칠 전 깨지게 되었죠. 빌은 어린 시절 미혼모였던 어머니 세라와 자신을 받아준 부잣집 마님 윌슨을 떠오르게 되죠. 마치 자신의 과거를 떠올랐던 빌은 원장 수녀 메리와 살가운 신경전을 벌여야 합니다. 그 인자한 미소 뒤에 악마보다 더한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빌은 고민해야 합니다. 딸들이 수녀원 학교에 다니고 있고 남은 딸들도 다닐 예정. 심지어 주 거래처만 잃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아일랜드의 석탄 영업소를 운영하는 사내가 마주한 불편한 진실과 그것과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문질러도 더러운 손은 정의를 향해가는 순간 깨끗해집니다. 오지랖일 수 있고 불리해질 수 있는 상황 속의 빌의 선택은 공감이 갑니다.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경계하는 것이 어디까지 정의이며 어디까지가 참견(오지랖)이냐는 것입니다. 남들도 모두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것.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권력의 조직이나 인물과 다툴 경우 자신에게 이익보다 손실이 많고 자기 자신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오지랖은 어느 누군가에게 잘난 척, 재수 없음으로 비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모두 울부짖지만 실상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녀원에 위치한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까지 자행된 실제 사건이 벌어진 장소라서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이 매춘부나 미혼모 등이었고 보호란 목적으로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킬리언 머피의 공포로 가득 찬 숨소리는 이 영화의 일등공신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 ‘맡겨진(말없는) 소녀’가 떠올랐는데 역시나 이 작품의 원작은 소설 ‘맡겨진 소녀’와 동일한 클레어 키건이 원작입니다.
빌은 역시 그 다운 선택을 합니다. ‘말없는 소녀’의 엔딩처럼 거창하지 않은, 하지만 응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엔딩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교회의 공연이 있습니다. 근데 이 공연을 보는 사람들… 하나같이 노숙자들입니다. 목사의 설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경청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료 급식이죠. 리더 격인 ‘긴’과 게이인 ‘하나’가 급식을 받고 하나는 1인분을 더 달라 요청하죠. 가출 소녀 미유키가 하나가 건네준 식사를 받아먹습니다. 세 사람은 티격태격하지만 늘 있는 일이죠. 어느 날 재활용품 수거함(이라 읽고 쓰레기통이라 쓰는)에서 갓난아이를 발견해요. 긴을 제외하고는 아이는 처음 맡는 거지만 아무튼 보살피기로 마음먹는데 다음날 하나는 생각을 바꿔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근데 힌트가 될만한 게 보이지 않던 상황에 지하철 락카룸키를 발견하고 거기서 의문의 소지품을 발견합니다. 야쿠자도 만나고 외국인에게 납치에 동네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이들의 여정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부모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은 철거로 엉망이 된 집터만 보이고요. 근데 이 아이 느낌이 왠지 선물 같은 아이입니다. 자, 이 아이 키오코의 운명은 이 세 사람에게 달렸는데 그러기엔 이 사람들 뭔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느낌이라서 걱정이 되는군요. 아무튼 가족을 찾은 것 같은데 느낌이 싸~ 합니다. 뭔가 이상해요. 아마 이 얘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죠?
애니메이션 영화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東京ゴッドファーザーズ/Tokyo godfathers)은 노숙자 3인이 아기의 주인을 찾아주는 여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유쾌하지만 그 속에 뼈 때리는 교훈들을 주고 있죠. 곤 사토시란 인물이 익숙지 않으시겠지만 일본 애니를 많이 보신 분이라면 ‘파프리카’, ‘천년여우’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그의 과거 작품들에 비해 밝고 경쾌한 편으로 알려져 있죠.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노숙자 삼인방이 벌이는 이 이야기는 다양한 사건들을 보여주죠. 미유키가 납치(?) 되었다 끌려간 곳은 외국인들이 사는 우범지대인데 그곳의 여인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미유키와 키오코를 따뜻하게 맞이하죠. 서로의 과거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인데 긴은 경륜 도박에 빠져 가족을 볼 마음이 없어 집을 나왔고 하나는 자신이 일하는 바에서 손님과 싸운 데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괴로움에 노숙자가 됩니다. 미유키는 자신이 데려온 길고양이가 사라지가 경찰인 아버지가 방치해서 사라진 것이라며 화를 내며 가출했죠.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생각했지만 긴은 장성한 딸과 아내가 여전히 그를 기다렸고 하나는 바의 사장이, 미유키는 신문광고로 각자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죠. 아이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이들의 선행은 마지막 절정에서 큰 빛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누가 더러운 걸까요? 마음만큼은 그들이 더 깨끗할 텐데 말이죠.
성탄절용 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 영화라고 봅니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과 가족만큼 진한 우정과 사랑… 어느 것이 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묘하게도 두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리 깔끔한 외모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석탄으로 얼굴과 손이 까만 노동자가 있는 반면 악취를 풍기는 노숙자들이 큰맘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때 사람들의 표정은 경멸로 가득 차있죠. 빌은 자신처럼 살지 않길 마음에서 소녀를 구했고 노숙자 삼인방은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는 게 도리라며 모험을 떠났죠.
공교롭게도 앞에서 이야기했듯 두 작품의 배경은 성탄절을 전후로 합니다.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크리스마스 영화가 아니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나눔을 살천하는 것은 꼭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만 생각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도 연말이 되면 그 생각이 더 나는 이유는 아기 예수가 이 땅에 나타나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듯 우리에게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순간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연말 ‘나홀로 집에’의 캐빈도 좋고, ‘러브 액츄얼리’의 연인들도 좋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성탄의 의미뿐 아니라 항상 365일 이웃을 생각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봅니다. 나라꼴은 엉망이어도 아직 우리에게 거리에 휘날리는 응원봉처럼 찬란한 빛이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