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uybrush Oct 11. 2021

오징어 게임이 재밌는 이유: 감정의 설계도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를 서비스하는 전 국가에서 1위에 오르며 엄청난 화제다. 넷플릭스가 공개한 TV 드라마 중 시청자 수 누적 1위(8200만 명)인 <브리저튼>까지 제칠 기세다. <승리호>가 글로벌에서 반짝 흥행 순위에 오른 적이 있었지만 <오징어 게임>은 양상이 다르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성과와도 다르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녹색 츄리닝과 게임을 진행하는 요원을 코스프레하고, '달고나'를 궁금해한다. 작품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상에서 <오징어 게임>의 요소를 즐기려 한다. 진짜 히트작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이 히트하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도박 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등 일본 만화에서 설정을 따오고, 데스 게임의 요소를 온통 짜깁기 한 독창성 제로의 작품이라는 비판에서부터, 흔히 보이는 - 이른바 납작하다고 평가받는 - 평면적인 캐릭터에, 가족 관계를 이용해 감정을 자극하는 뻔한 신파까지.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이런 세 가지 비판 - 뻔한 이야기/납작한 캐릭터/신파 -는 웬만큼 흥행하는 영화에는 항상 따라붙는 비판 3종 세트이기도 하다. 비판 글을 읽다 보면 <오징어 게임>처럼 뻔하고 재미도 없는 작품이 왜 글로벌 흥행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징어 게임>은 재미있다. 넷플릭스를 통한 글로벌 흥행이 이를 증명한다. 비록 증명이 끝난 문제이지만, 비평이 아닌 창작자의 입장에서 왜 <오징어 게임>이 재미있고, 무엇이 사람들이 9편이나 되는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내가 영상물을 만드는 창작자는 아니고, 웹소설 작가로 '이야기'를 다루기에 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뻔한 설정과 스토리라는 비판을 생각해 보자. 뻔하다는 것은 앞으로의 전개와 주인공의 선택이 다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뻔해서 재미없다'는 전제는 사실 잘못됐다. 뻔해도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뻔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수 있다.


이야기의 재미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흔히 충격적인 스토리와 반전, 극적인/드라마틱한 전개를 많이 뽑는다. 이는 재미요소가 보이는 몇 가지 패턴인데, 이런 패턴의 핵심은 '변화'다. 이야기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상태와 능력, 성격 등이 크게 요동치고 변화할수록 사람들은 재밌다고 느낀다.


권선징악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했다가 이를 정화시키기 때문에 만고불변의 인기 플롯이지만, 착한 사람이 고통받다가 구원받는 변화,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변화의 낙차가 크기 때문에도 재미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밑바닥 인생이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거듭나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보이기에 재미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언제나 높은 시청률이 나오는 막장 드라마는 매회 지난 회의 스토리를 뒤집어 사람들의 입장과 상황이 뒤바뀌는 변화를 주기 때문에 재미있다. 제 아무리 화려한 배우와 아름다운 화면빨, 웅장한 음악을 곁들여도 시작부터 끝까지 변화 없이 흘러가는 영화는 밋밋하고 졸리다.


그렇다면 이야기 안에서 다양한 변화만 주면 재미있을까? 창작자 입장에서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변화를 1차원적으로 해석한, 재미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이런 경우, 극에 손쉬운 변화를 주기 위해 쓰는 수단은 자극을 키우는 것이다. 즉, 폭력과 섹스의 수위를 높이거나, 그저 주인공에게 주는 고통이나 쾌락의 점진적으로 계속 늘리기만 한다. 초반에는 반짝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늘어나는 상태'란 사실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다음에는 그냥 더 강한 무언가가 나타날 테니까.




사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스토리, 영상, 음악, 연기 등은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니다. 작품이 이끌어 내고, 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표는 관객의 몰입, 감정, 공감이다. 모든 것은 관객의 마음속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은 관객의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의 '강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감정의 '종류'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이다. 하나하나 회차별로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 내는 감정의 지도를 따라가 보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먼저 1회,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것은 '충격'이다. 모든 훌륭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일단 충격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의 정석이다. 주인공이 처한 상항과 성격을 먼저 보여주고, 그의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성기훈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고, 죽음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그 역할을 한다.


아마 콘텐츠를 많이 접한 사람이나, <오징어 게임>을 비판적으로 보는 분들은 1회에서 이미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1회만 봤을 때는 좀 갸우뚱했다. 데스 게임 설정은 카이지와 너무 흡사하고, 주인공 성기훈이 처한 상황 - 빚더미, 아픈 어머니, 미국으로 가는 딸 -은 신파 소재로 쓰일 게 뻔했고, 시작 장면에서 마지막 게임은 오징어 게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데스 게임류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1회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이 사실 별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잡히면 죽는다는 걸 관객은 알고 있으니까. 충격을 주어야 하는 1회에서 너무 뻔한 전개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2회에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나는 사실 오징어 게임이 진짜 히트하고 끝까지 보게 하는 요소는 2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2회에서 죽음을 목격한 참가자들은 패닉에 빠지고, 게임을 그만두는 투표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그만두자고 하는 쪽이 더 많다. 그래서 게임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보통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끝없이 내달리기만 하지 않는다. 반드시 이야기에서 숨 고르기 구간이 있다. 관객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지치지 않도록 해야 더 강력하게 몰입한다. 숨 고르기를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리듬과 관객이 느끼는 감정선이 달라진다.


<오징어 게임>은 2회에 '숨 고르기'를 배치하고, 게이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러면서 다양한 효과를 얻는다. 그들은 현실 앞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충격이 사실은 충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만큼 절박한 사람들은 이미 현실이 훨씬 더 충격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절실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서 돈을 가져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어떤 참가자는 내통을 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한다. 참가자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재확인한다.


이제 준비된 참가자들은 3회에서 약한 자들을 미리 처치하면서 피의 축제를 벌인다.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혼란'이다. 혼란을 거치며 참가자들은 알아서 팀을 짜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팀은 4회, 5회를 거치면서 '동지애'를 느낀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인생이지만, 게임을 함께 헤쳐나가고, 함께 살아남으면서 똘똘 뭉치게 된다. 특히 줄다리기에서는 오일남의 전략과 조상우의 전략이 빛나면서 압도적으로 불리하던 주인공 팀이 승리하는 장면은 한 번 숨 고르기를 했던 이야기의 힘에 탄력을 붙이며 관객의 감정을 한껏 고양시킨다. 이제 착한 편들이 뭉쳐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6회, <오징어 게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주는 6회에서 앞서 쌓았던 동지애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린다. 둘씩 짝을 지으라는 말에, 참가자들은 앞서 협동전을 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친하면서, 믿을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짝을 찾는다. 그러나 현실은 서로를 죽여야 한다.


누구는 망설임 없이 게임에 나서고, 누구는 끝까지 망설이고, 누구는 사기를 친다. 6회의 감정은 '죄책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은 자는, 함께 여기서 나갔으면 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 그렇게 한껏 고양시켜 놓은 관객의 감정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패대기친다.


6회가 그토록 감정을 울리는 이유는 서로를 죽여야 해서 고민하고, 그 상황에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신파를 연출해서가 아니라, 앞서 동지애라는 감정을 심어주고는, 바로 다음에 서로를 배신하게 해서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감정의 종류를 뒤집어 버림으로써 보고 있던 관객들까지 부들부들 떨리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6회에서 지금까지 가장 능력 있고,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던 조상우가 변하기도 한다. 그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알리가 자기를 좋아하고 믿는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사기를 친다. 그는 어떻게든 돈을 가지고 살아나가겠다는 마음에 굴복한다. 드문드문 나쁘게 변할 거라는 신호를 주었는데, 6회는 그가 변할 계기를 주기에도 최적이었다.


이제 죄책감의 늪에 빠진 참가자들에게 구원은 없다. 그들은 7회, 8회, 마지막 9회를 거치며 계속해서 나락으로 빠져든다. 이제 조상우는 살기 위해 거칠 것이 없다. 거리낌 없이 상대를 밀고, 칼을 휘두른다. 가장 친했고, 가장 든든했던 동반자 조상우의 존재가, 이제 주인공 성기훈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된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관객을 안타깝게 하고, <오징어 게임>을 끝까지 보게 만든다.




<오징어 게임>은 관객의 감정을 다양하게 흔들어 놓는다. 뻔한 설정과 신파의 소재를 듬뿍 담았지만, 이런 소재를 이용해서 감정을 다양하게 변주시킨다. 마음의 한쪽 면만 계속 찌르는 게 아니라, 찔렀다가, 보살펴 주었다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가, 힘을 주었다가,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렇게 다양한 줄도 몰랐던 마음의 여러 구석을 건드린다.


그저 더 강한 게임, 더 충격적인 게임, 더 폭력적이고 야한 게임으로 감정의 강도를 높이는 손쉬운 길을 갔다면 <오징어 게임>이 이토록 흥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동혁 감독 인터뷰를 보니 <오징어 게임> 시나리오를 쓰다가 스트레스로 이가 6개나 빠져 모두 임플란트를 했다고 한다. 어디선가 다 봤던 설정을 그저 짜깁기 하는 거라면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리가 없다. <오징어 게임>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물밑에서 흘러가는 관객의 감정을 세심하고 철저하게 설계했다. 또한 이런 판을 벌이는 미치광이 인간들, 프론트맨과 침투한 경찰이라는 서브플롯으로 이야기가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게 했다.


이렇게 다 완성된 이야기를 다시 되짚어 보면 모든 것이 참 쉬워보인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따로 없다. 원칙이 간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극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감정의 강도뿐 아니라 종류에도 변화를 주면서 특히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계속 비틀어 주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를 그렇게 이끌어 가는 수단이다. 주인공과 인물들에게 어떤 상황을 부여하고,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들 것인가? 그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가? 창작자는 매 순간 이런 질문을 마주하고, 올바른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정말 답답하게도 원칙은 있지만, 절대로 정답은 없다. 모든 것을 완성하고 창작자의 손을 떠나 흥행이라는 답안지를 받아볼 때까지 무엇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7회에 나오는 유리 다리 건너기와 비슷하다. 어느 쪽 길이 날 지탱해 줄 강화 유리인지, 나락으로 빠뜨릴 유리인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행히 <오징어 게임>은 중간중간 흔들리기도 했지만 안전한 끝에 도달했다. 이것이 내가 <오징어 게임>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