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 결말을 알려주었던 드라마
요즘 자꾸 드라마 <모래시계> 생각이 나서 1~4회를 다시 봤다. 25년이 지난 드라마인데도 지금 봐도 별로 촌스럽다는 느낌이 없을 만큼, 뭐하나 빠지지 않는 시대의 명작이다. 보면서 정말 소름이 돋았던 점은, 1~3회에서 이미 앞으로의 스토리와 주인공들의 결말을 전부 복선으로 깔아 두었다는 점이다.
1회는 주로 박태수(최민수)를 조망한다. 첫 장면에서 국가 간부 장도식은 박태수에게 일을 제안한다. 하지만 박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깡패가 함부로 나랏일에 끼어들면 그 끝은 사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래시계>는 박태수가 사형을 당하면서 끝난다. 그 유명한 대사 "나 지금 떨고 있냐?"를 남기고.
2회는 강우석(박상원) 이야기다. 강우석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가난하지만 굳건한 가치관으로 사는 아버지 밑에서 법대를 가서 힘없는 사람들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하라는 말을 듣고 법대에 간다. 그는 사시에 붙어 판검사가 되려 한다. 그런데 절친 박태수가 깡패가 되어 자꾸만 엇나간다. 박태수는 육사를 가려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 연좌제로 엮여 실패하자 깡패가 된 것이다. 그의 마음을 돌리려는 강우석은 박태수에게 말한다. "계속 이러면 내가 나중에 너 잡으러 다닐 수도 있어." 이는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압축해서 미리 보여준다.
3회는 카지노의 대부 윤 회장의 딸, 윤혜린이다. 혜린은 중학생 때 윤 회장의 라이벌에 의해 납치당한다. 그런데 윤 회장은 전화로 딸에게 "널 구하러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 곁에는 백재희(이정재)가 있었다. 재희는 혜린을 납치한 일당 중 하나지만, 오히려 그녀를 구해준다. 그는 윤 회장에게 딸의 위치를 알려주고, 혜린을 해코지 하려는 폭력배들을 막다가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 <모래시계> 종반부에 가면 재희는 마지막까지 혜린을 지키다가 맞아 죽는다.
이렇게 드라마는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의 큰 줄기가 어떻게 될지,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그들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알려준다. 인물의 관계와 운명의 퍼즐을 어떻게 저리 완벽하게 맞췄는지, 보는 내내 감탄만 계속했다. 저때의 송지나 작가는 정말 각본의 신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매회 한 인물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모든 것을 알고 보는 입장에서는 큰 무리가 없지만 처음 보면 다소 헷갈릴 수는 있는 구성이다. 그래서 초반 흡입력이 중요한 요즘 드라마 구성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문법이다.
이는 <모래시계>가 초반에 어떤 사건이 터지면서, 이를 중심으로 쭉 극을 끌고 가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래시계>는 세 명의 주인공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굴곡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만나고, 엇갈리는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사실상 대하드라마에 가깝다. 이제는 <모래시계>와 같은 작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