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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봉 May 23. 2017

영어가 안 되는 이유는  당신 탓이 아니라 조상 탓이다

# 1905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 우린 영어도 빼앗겼다

왜 우리는 영어가 그토록 안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하며 자괴감에 빠지거나 영어는 원어민과 해야 하는데  원어민과의 노출이 없어서 그렇다던지, 아니면 영어 발음이 안 좋아 그렇다던지 등등 나름대로 너무나 많은 이유와 변명들을 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만 공부한 것만 생각해도 최소 6년은 되고, 초등학교부터 치면 최소 10년은 다들 넘을 것이다. 그리고 원어민과의 노출의 문제는 이미 과거 정부에서 몰입교육이란 이름으로 한 차례 다 실험해 본 일이다. 물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론은, 이젠 할 것 안 할 것 다 해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병으로 치면 이것저것 안 해 본 것이 없는 말기 환자와 같다. 이렇게 된 여러분들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다.


“당신이 지금까지 영어가 안 되는 이유는 당신 탓이 아니라 조상 탓이다.”

그동안 영어에 지친 당신에게 진정으로 위로가 되는 한마디가 아닌가? 필자는 수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강의를 진행해 왔다. 강의 대상자들도 나이, 성별, 학벌, 직업과 상관없이 다양한 대상들을 만나왔다. 때로는 저런 정도의 학벌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왜 영어를 못할까? 내가 되려 이상하게 느낄 정도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왔다. 그 모든 분들께 외쳐왔던 첫마디가 바로 "당신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당신 탓이 아니라 조상 탓이다"란 한 마디였다.

정말이다. 진실이다.

여러분을 단지 기분 좋게 해 주려고 필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자~ 이제 찬찬히 그 이유를 살펴보자. 모든 병이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병을 고칠 것 아닌가? 오늘 우리는 영어라는 병을 고치기 위해, 먼저 병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정말로 여러분이 영어가 안 되는 이유는 조상 탓이다. 우리 조상이 영어와 관련되어 무슨 욕먹을 짓을 했단 말인가? 그건 바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일 때문이다.


1905년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순간 우리는 올바른 영어 교육 또한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을사늑약 조약 체결 이후, 외교권 박탈과 일제 통감부 설치, 일제에 의한 교육제도 개편으로 인해 이 땅에는 듣고 말하는 진정한 영어는 사라지고, 일본인 교사가 가르친 영어 수업에서는 단지 영어를 한국어나 일본어로 번역해 내는 영어만 존재했었다.

영어 자체를 원어민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영어를 듣고 만들어 내는 방식대로 영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언어 배열 순서 측면에서 정반대에 가까운 한국어나 일본어로 번역해 내는 독해 공부만 강요받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배운 영어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벙어리, 귀머거리 영어가 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학생들의 어학 능력은  빠르게 퇴보해 갔었다.

그동안 왜 전 세계에서 한국, 일본 이 두 나라만 유독 영어를 못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1905년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두 나라는 동일한 벙어리, 귀머거리 영어를 함께 나눠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일본의 영어는 말하기, 듣기, 쓰기를 등한시 한 번역식 영어가 된 것일까?


그 시작은 19세기 메이지 유신 때부터 시작된다. 서구의 문물을 빠르게 습득하고 싶었던 일본의 지배층은 다음과 같은 길을 선택한다.

“정부 기관 내에 ‘번역국’을 설치하고, 서양 근대 기술문명의 모든 성과들을 빠짐없이 번역하여 국민들에게 보급하라!”

1854년 메이지유신 때부터 일본에서는 빠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서양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이에 따라 서양 근대 기술의 모든 성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번역하여 빠르게 보급하는 번역은 강력한 근대화의 도구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본의 본격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은 단지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닌, 국가생존 전략이요 프로젝트였다.

결국 일본에서의 영어는 원어민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일본어로 번역을 하기 위한 대상이 되었고, 번역이 영어 공부의 핵심이 되었을 뿐이다.  



#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본 번역식 영문법의 역사
일본식 영문법의 시작

일본식 영문법의 시작은 메이지 유신 때 출판이 되어 50쇄 이상을 기록한 ‘오노게이의 영문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노게이의 영문법’이란 책은 그냥 그때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고 정식으로는 ‘오노게이지로’ 라는 일본 교사가 쓴 책인데, 그 책의 목차와 내용 구성이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양국(일본, 우리나라)의 영문법책과 유사할 정도이니 메이시 유신 시대에 번역을 위해 만든 영문법책을 우리는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일본 기자와 이야기하다가 기자가 배웠던 영문법 용어가 일본과 똑같다는 점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일본과는 심지어 영문법 참고서 목차까지도 닮았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도 사실 영미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만 유독 유명한 영어 어구다. 19세기 삿포로대 농대 초대 부학장으로 있던 윌리엄 클라크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말이 일본 영문법 참고서를 거쳐 한국에 넘어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 영문법 참고서가 얼마나 일본 책을 베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종식 동아 일보 국제부 차장 - 2009년 3월 26일 목요일 동아일보-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 뒤 -  잘못된 친일파 영어의 지속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 뒤에도 이러한 일본 번역식 영어 문법은 지속되어 왔는데, 이는 일본 동경 대학, 와세다 대학 등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당연히 일본식 영어를 가르쳤고, 그 폐단은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의 대다수가 일본식 영문법 위주의 학습을 하였고, 그 결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상당히 취약한 분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는 이런 분들에게 강점이 있는 독해와 문법 위주의 교수법이 당연히 선호가 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교육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 영어 (1950년대  ~   )

저자인 안현필 씨는 1950 ~ 1970년대 베스트셀러 영어교재의 저자로서 13세 때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홋카이도 삿포로 상고 교사를 역임했다. 그는 국내에 귀국하면서 자신이 일본에서 배웠던 번역식 영어를 기초로 하여 '영어 기초 확립'  등의 학습서를 써내고, 이 책들은 순식간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후 당시 명문고등학교였던  경기고 및 서울고 영어과 주임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한국외대 교무과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안현필 씨는 한국 입시학원계에서는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입시학원 격인 'EMI' 학원(서울 종로 소재)을 세워 전국의 수험생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그로 인해 1960년대 큰 사회적 부를 얻게 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영어실력 기초, 삼위일체 영어, 영어 기초 오력 일체 외 다수가 있다.  하지만 학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결국은 일본식 영어를 배운 것이니 해방 이후에도 이 땅에는 일제식 영어의 뿌리는 더욱더 공고해져 갔다.        

            

성문 종합 시리즈  (1960년대  ~     )

여전히 안현필 씨의 저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영어 학습서의 전설로 자리 잡게 될  송성문 씨의 '정통 종합 영어' 가 1967년 등장한다. 1976년에는 이름이 '성문 종합 영어'로 바뀌고, 표지도 그 전통적인 파란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1977년에 '성문 기본 영어' 가 발간되면서 '성문 종합, 핵심, 기본'의 트로이카 체제는 안현필 씨의 책들과 함께 70년대를 장악한다. 성문영어는 1960~70년대의 일본 교재들의 구성이나 내용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일단 번역이나 문법 내용이 일본 책에서 따온 듯한 것이 많으며,  한국어 번역을 보면 일본어를 중역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상당수 발견된다.  

저자인 송성문 본인에 의하면 '메들리 삼위일체'라는 책을 참고하긴 했지만 베끼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2011.06.25  - 조선일보 저자 인터뷰 기사 >


영문 해석 연습 1200제   (1970년대  ~    )

70년대에 들어서 ‘영문 해석 연습 1200제’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일본 대학 본고사 문제 1200 개를 추린 책이었다. 일본 대학 입시에서 우수한 문제들을 도쿄대 교수가 해설해 놓은 것으로, 이때는 전국적인 고교 비평준화 시절로 당시 명문고,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일본 학습서를 구해다 보는 것이 인기였는데, 이에 발맞추어 인기를 끌었던 책이 지금도 나오는 '영문 해석 연습 1200제'이다.


맨투맨    (1980년대 ~     )

80년대에 들어서 무소불위의 성문영어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장재진 씨가 성문종합영어와 유사한 '맨투맨'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맨투맨은 성문영어와 함께 80년대 중고등학생 영어 참고서의 새로운 강자로 떠 오른다.  

맨투맨과 성문을 다 같이 공부해 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새로운 책이라기보다 성문의 본문에 학원 강의 스타일로 친절한 설명들을 많이 담아 분량만 5권으로 불린 책 같았다. 즉, 성문을 통해 유지해 온 일제식 영문법에 근거한 번역 영어는 여전히 맨투맨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이어져 왔다는 얘기다. 들리는 얘기로는 성문과 법적 분쟁을 유발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현재

영어 강사분들 중 과거 1타로 군림했던 대다수는 80년대 학번, SKY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80년대에는 대학에서 공부를 제대로 못할 상황이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수업 거부가 다반사였던 때였다. 그런 환경에서 학생운동 이력으로 인해 기업에 취직을 못하게 된 사람들이 학원가로 많이 유입이 되었다. 그들이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자신들이 대학입시 때  바이블처럼 여겼던 성문종합이나 맨투맨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친일 잔재의 일제식 영어는 그 장구한 역사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제 번역식 영어가 기나긴 시간이 흐른  현시점에도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영어 수업 시간
한국과 똑 같이 'to 부정사'를 가르치는 일본 영어 수업


거꾸로 뒤집기와 끊어 읽기

지금도 수능 방송이나, 여타 영어 시험을 위한 강의들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영어 해석은 일본식 번역 영어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아, '후치 수식'이란 이름 하에 문장 끝에서부터 거꾸로 뒤집거나, '끊어 읽기, 구문 독해, 청크 단위'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일정 부분을 잘라서, 살짝살짝 뒤집어서 해석해 나가는 두 가지 방법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정말 알아야 한다.

전 세계 원어민은 어느 누구도 영어를 읽을 때 거꾸로 뒤집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 어느 나라 사람도 자기네 말을 이해할 때, 단어가 등장하는 순서대로 이해하지 마침표가 있는 저 뒤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이해하지는 않는다.

이 거꾸로 뒤집기식 이해 방법은 전 세계 원어민은 누구도 모르는 우리들만의 황당한 비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놀라운 비밀이 하나 더 있다.

 

영어와 관련하여, 1905년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기 전에 조선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1800년대 조선 말기에 이 땅에서는 영어를 쉽게 익혔고, 나아가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었다는 사실이다.


양반인 장씨의 아들은 왕명으로 통역에 임명됐다. 19세의 이 젊은이는 영어의 해석과 회화에 완벽했다.    - A. H. 새비지 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양반 장씨의 아들 장봉환 - 실제 인물


영국 영사가 본국에 보고하기를 조선 사람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그 뛰어남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감히 따르지 못할 것이라 보고되고 있다.    - 1901년, 시노부 준페이, <한반도>


조선말, 개화기 때 우리는 영어를 외국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처음 영어를 배웠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15세 이후에 영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 정도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음을 증언하는 자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이때 조정에서도 젊은 관리들이 영어를 배워 외국으로 가서 서양의 문물을 배워 와 조선의 개화를 이끌었었다. 조선에서 처음 영어를 배운 이들은 후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선포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헤이그 특사들은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역만리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로 파견되어, 만국 평화 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어진 것임을 알리고자 했다. 그들은 유창한 영어로 연설뿐만 아니라 강연까지 하였었다. 그들이 헤이그로 간 시기가 바로 1907년,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1800년대 말에 조선에서 영어가 그 정도 실력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헤이그 특사 (1907년)


이제 방법은 하나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았듯이

이제 영어를 되찾아야 한다.  

나라는 해방이 되었는데, 아직 영어는 일제 치하에 있는 것이다.

이제 영어도 친일파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맞이해야 한다.

일본 번역식 영어에서 벗어나 영어를 원어민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다시 찾아야 한다.


2편에서는 일제강점기 전 너무나도 쉽게 영어가 되었던 우리나라의 사례를 중심으로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영어 천재였는지, 그리고 이에 따른 영어공부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by 애로우잉글리시 최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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