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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eMir Feb 20. 2020

다시 찾아온 Largo

또 다른 워라벨, 자신만의 고요 지키기

A 고객사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일이다. 유능한 멤버들과 팀이 구성됐고, 젠틀한 고객을 만나 좋은 결과를 만들 거라는 생각이 내 안의 두려움을 이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매일 더 높은 요구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요구에 버틸 수 있는 내 에너지 총량이 다 소진된 느낌이었다.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고, 어느 순간 다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학창 시절 12년을 개근했고, 대학시절 출석으로 승부했고, 지각은 좀 했지만 무단결근 한 번 없었으며 고객사 협업에서 일정을 지켜내던 나의 "견딤력"에 균열이 느껴졌다. 경영학 내용들이 모두 짜증으로 다가왔다. 혁신, 성과, 효율, 가치, 핵심 성공요소, 분석, 논리적 사고 같은 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줄이려 했던 담배와 커피를 늘려서인지 더 두근거렸고, 잠을 자는 건지 그냥 누웠다가 일어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둔다고 말하고 도망갈까? 그렇게 마음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에 늦은 시간까지 프로젝트 룸에 혼자 남았고, 집중을 위해 에어팟을 꺼냈다. 애정 하는 플레이리스트 곡들이 지루했고, 랜덤 곡 재생으로 손을 옮겼다. 그 때 그 곡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niaGuY3Ic

출처 : LARGO - G.F. HÄNDEL - piano - easy - Harry Völker

헨델의 Largo... 그럴 때가 있다. 세상이 멈추고 그 곡과 온전히 대면하는 때 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한참 동안 무장해제된 상태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조금 쌀쌀했지만 손에 든 믹스커피 온기에 기대 걸을만했다.


나는 이 곡을 영화 4등에서 처음 만났다. 1등을 바라는 엄마는 수영 코치에게 맞는 것보다 4등이 더 무섭다고 말한다. 수업 중 레인을 벗어나는 준호와 화를 내며 나오라고 다그치는 수영 코치. 준호는 좋아하는 수영을 자유롭게 즐기며 수영장 안으로 들어온 빛을 쫓아 헤엄쳐간다. 이 장면에서 Largo의 선율이 흐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싶은 준호와 그것으로 세상과 승부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준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를 안아주는 영화들이 많지만 4등은 내가 꼭 안아주고 싶은 영화였다. Largo는 치열함 속에서 잠시 벗어나는 자유로움, 여유로움으로 그렇게 내게 남았고, 열심히 검색해서 폰에 담아 두었다.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91012#1045815

Largo가 흐르는 밤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다가오는 것들에 많이 흔들리는 나,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며 누구에게도 흠 잡히기 싫어 몸부림치는 나, 무슨 일을 할까 보다는 어떻게 일할 까에 대한 생각 등 내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Largo의 뜻인 폭넓고 느릿하게 처럼 조금 느려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생각대로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는 생각은 위안이 됐다. 이후 프로젝트 내내 Largo를 들으며 무엇이 다가오든 나만의 고요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일을 마무리했다. 먹고사는 일에 지쳤을 때 자신만의 균형 잡는 법이 필요한 것 같다. 내게는 그랬다.


오랜만에 쭈니와 도서관 데이트를 떠났다. 11월 말에 예쁘게 색이 변한 가을 나무들을 만났다. 또다시 조급해진 내게 Largo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을 정리하고 페북에 글을 올렸다.




늦게 색이 변하는 나무들이 있다.
조금 늦을 뿐이지 괜찮다.
급한 맘이 들 때면 그날의 Largo를 떠올리며
“나만의 고요”를 다시 생각해본다.  

가는 길에 한참 동안 새를 보며 키득 거려도...
책은 구경하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와도...
약속했던 레고 방이 문을 닫아도...
임무를 완수하고 간 헬스장이 문을 닫아도...
팔고 싶은 렌즈가 안 팔려도...
애플 비번을 잊어버려 아이디가 잠겨도...


조금 늦을 뿐이지 괜찮은 거다.



어쩌면 잘 지낸다는 건...

다가오는 것들에 흔들림 없이 나만의 고요를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 페북 글에 그날의 Largo가 뭐냐고 묻는 분이 계셨고, 느린 답변을 긴 글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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