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의 2000년대 - 02
긍정적인 자아 형성과 정서 발달을 위해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 중 몇몇은 애완동물을 집에 들이기 시작한다. 2000년대 초등학생‘에 의한’ 육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겠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1997년 국민 포털 네이버가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재량활동 시간에 컴퓨터 수업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많은 초등학생들이 컴퓨터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았고, 곧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에 익숙해졌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이미 인기를 끌었던 육성 게임 ‘심즈’와 ‘프린세스메이커’가 당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등학생이 즐기기에는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지만, 게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부모들은 초등학생 자녀에게 육성 게임 CD를 안겨주었다.
‘심즈’는 ‘심’이라 부르는 게임 속 가상 캐릭터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고, 이웃주민들과 살아가도록 하는 내용이었는데 게임의 자유도가 높아, 재미로 심을 혹사시켜 과로사에 이르게 하는 식의 플레이가 가능했다.
‘프린세스메이커’의 경우, (양)아버지 입장에서 딸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딸이 매춘부가 되거나 아버지와 결혼한다는 불건전해보이는 엔딩도 있었고, 무엇보다 고의로 ‘딸을 망치는’ 플레이가 유행했다. 이러한 게임 내용을 뒤늦게 안 부모들이 자녀에게 게임을 금지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일본의 ‘프린세스메이커’와 비슷한 콘셉트의 국내 육성 게임 ‘딸기노트’가 개발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딸을 키우는 형식의 게임이었는데, ‘프린세스메이커’에 비해 건전한 내용이었으며 핑크색 옷을 입은 소녀가 앨범 재킷에 그려져 있어 초등 여학생에게 인기를 끌었다.
또 다른 디지털 육성 사례로 ‘다마고치’가 있다. 이 동글납작한 2비트 그래픽의 디지털 기기로 가상의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었다. 다마고치라는 이름은 알(egg)을 뜻하는 일본어 ‘타마고’와 애칭 ‘-치’(시계 ‘와치(watch)’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도 있다)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다마고치는 9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는 여중생과 여고생을 중심으로 유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초등 남학생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과 ‘디지몬 어드벤처’ 캐릭터를 키우며, 기계를 이어 붙여 캐릭터끼리 대결시키기도 했다.
다마고치 속의 애완동물은 제때 (가상의) 밥을 주지 않으면 죽어버렸다. 하지만 이를 손쉽게 ‘리셋’ 시키고 새로운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었던 점, 가상이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을 타인과 대결시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점 등으로 생명경시 논란이 있었다. 자아가 형성되는 초등학생에게 다마고치는 곧 불량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초등학교에서는 다마고치를 금지하기도 했다.
다마고치의 유행과 더불어 가상의 애완동물 키우기는 인터넷 혹은 CD게임 형식의 유행을 가져왔다. 당시 방영되었던 ‘하얀마음 백구’를 비롯한 동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모험 및 육성 게임도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생명경시의 우려가 있어 초등학생 자녀에게 가상의 애완동물 기르기를 금지하는 부모가 많았다. 2010년대에는 ‘애완돌(애완용 돌멩이)’까지 등장할 만큼 육성 대상이 다양해졌는데—애완용 돌은 미국에서 게리 달(Gary Dahl)이라는 사람이 1975년에 만들어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0년대 화면 속 캐릭터 육성 게임 유행을 돌이켜보면 감회가 새롭다.
정작 생명경시를 논할 대상은 2000년대 초등학교 앞에서 팔았던 병아리와 소라게 키우기 세트이다. 당시 초등학생에게 유행했던 소동물은 금붕어, 햄스터, 소라게, 병아리였다.
병아리 상인(?)은 주로 토요일에 초등학교 앞을 찾았다. 그들은 메추라기 혹은 어른 병아리를 팔기도 했다. 주 6일 등교했던 당시 초등학생에게 토요일이란 4교시가 끝나고 화창한 대낮에 하교하는, 주말을 앞둔 여유롭고 경쾌한 요일이었다.
이때 판매되는 병아리는 농장에서 걸러져 나온 ‘불량품’으로, 문구점 불량식품 두어 개 가격인 500원이었다. 농장에서도 불량품으로 취급되었던 이들은 초등학생 품에 안겨 집에 도착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숨을 거두기 일쑤였다.
햄스터는 작고 키우기 수월하며, 대형마트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애완동물이었다. 2000년 처음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방가방가 햄토리’도 햄스터 유행에 한몫했다. 햄토리와 비슷한 ‘햄톨’은 2001년 상반기 햄스터 이름 인기 랭킹 1위를 차지했다. 햄스터 키우기 가이드북 역할을 한 어린이 만화도 등장하여 당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햄스터는 키우기 쉬운 만큼 스트레스에 취약한 동물이었다. 작은 동물을 보살피기에 서툰 초등학생들은 햄스터를 빤히 쳐다보거나 방치하고, 시시때때로 만지작거렸다. 스트레스가 쌓인 햄스터는 자신의 새끼를 먹어치우는 식자증에 걸리기도 했다.
현재는 고양이도 인기 애완동물이 되었지만 2000년대는 강아지가 애완동물로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다. 2000년대 이후 애완견의 대유행으로 개고기 식용 공론화가 더욱 어려워지기도 했다.(출처 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 문화사)
우리나라는 특히 강아지 품종의 유행의 변화가 심하다고 하는데, 2000년대 초반 인기 강아지 품종은 말티즈, 요크셔테리어, 푸들이었다. 특히 말티즈는 분양업자들이 “한국인 정서에 맞는 강아지”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에게 강아지 키우는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2000년대에 유행했던 강아지 중 하나는 ‘티컵 강아지’이다. 티컵 강아지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고, 외출할 땐 목줄 대신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강아지를 원하는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생명체였다. 성장이 끝난 후에도 컵에 들어갈 만큼 작은 초소형 강아지라는 뜻인데, 사실 이런 품종의 강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미숙아 강아지, 혹은 영양실조의 갓난 강아지를 다 자란 티컵 강아지라 속여 판매하는 판매업자와 그 피해 강아지만 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 DNA 조작으로 만들어진 티컵 강아지는 성견이 되어서도 여전히 작으며,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결국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가 컵 안에 들어간 사진에 ‘티컵 강아지’라는 수식어를 붙인 사기였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서울 중구 충무로 대한극장 주변은 80~90년대 ‘애완견 거리(애견거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1980년 1가구 1자녀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외동인 자녀에게 애완견을 선물하는 가정이 늘어나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애견산업의 성장성을 본 대기업들이 하나둘씩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형마트에서 작은 애완동물을 취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트에서 강아지를 팔지는 않았지만, 애견용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했다. 영세상인들의 애견거리 같은 상권은 자연스레 시들어버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가정 분양’이 인기를 끌었다. 펫샵에서 판매하는 동물은 비위생적, 비윤리적으로 운영되는 강아지 공장에서 태어난 새끼가 많았고, 길가의 유리창을 향해 난 칸막이 구조의 펫샵은 동물의 건강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과 환경이 펫샵에서의 분양을 기피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인터넷 카페가 발달하며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끼리 온라인 소통이 생겨났다. 유저들은 이곳에 가정 분양 정보를 올리기도 했다. 가정 분양이란, 일반 가정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2~3달 정도 돌보다 다른 집으로 분양 보내는 것을 말한다. 어미 곁에서 3개월가량 머문 새끼는 다른 집에서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 진정한 ‘육성’의 주체는 아직 어린이인 90년대생들이 아닌, 그들의 부모님이었다. 70년대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표어가 나온 이후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90년대까지 두 명의 아이가 있는 핵가족이 주를 이루며 가족의 표준 규격은 4명이 되었다. 그 후 외동 자녀를 둔 핵가족이 늘어나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급기야 2004년에는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와 같은 표어가 등장했다. 이밖에도 2000년대에는 사교육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90년대생 자녀를 둔 그 당시 부모님들은 십 대가 된 자식 교육문제로 머리를 싸맸다. 인터넷의 발달로 90년대생은 부모세대와는 또 다른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코딩 교육’ 열풍처럼 그 당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 학원이 인기였다. 이밖에 영어유치원, 제2외국어, 예체능, 각 과목 학원과 과외까지 다양한 사교육이 존재했다. 사교육비 또한 가계의 큰 부담이 되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아이 한 명을 대학 갈 때까지 키우는 데 최소 2억”이 든다는 신문기사도 등장했는데, 여기에서 ‘아이’란 나 같은 1990년대 출생자였다.
다음 글에서는 90년대생이 2000년대에 겪은 ‘교육’ 이야기를 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