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국민 지도자의 숨겨진 면모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다만 노벨문학상은 작품이 아닌 작가에 주는 상이며 채식주의자 역시 그 해석을 두고 오해가 많다. 소설에서 채식은 일종의 ‘은유’에 가깝지만 이 글은 문학평론이 아니니 각설하고...
채식은 그 범위와 목적 등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베리에이션이 존재한다. 채식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인도인데, 그 중심에는 제국주의에 비폭력으로 맞서온 국부격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가 있다. 모 게임에서 ‘유혈사태’로도 유명한 간디의 풀 네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이며 ‘마하트마’라는 호칭은 시인 타고르가 붙였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 간디는 1869년 인도 구자라트에서 출생했다. 부친 카람찬드 간디는 소국인 포르반다르 수상이었으며 카스트 계급은 바이샤, 즉 평민이다. 13세의 나이에 결혼한 간디는 어린 시절 일탈이 잦았다고 한다. 교리를 어기고 염소고기를 먹는 게 시작이었는데, 서양식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어느 순간 고기를 탐내는 자신을 깨닫고 중단했다고. 성매매를 하려다 실패하는가 하면 하인이나 가족의 물건을 훔쳤다는 등의 일화도 있다.
18세 때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간디는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런던에서 대학을 마친 후 변호사가 되면서 한동안 영국에서의 생활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개업을 위해 남아프리카로 향하던 중, 간디는 일생 일대의 변곡점을 맞는다. 기차 1등석을 예약했으나 옆자리 영국인이 “냄새나는 유색인종과 함께 있기 싫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차장은 항의하는 그에게 2~3등석 자리가 없으니 짐칸으로 가라며 모욕하고 급기야 기차에서 쫓아냈다.
상위 카스트 출신에 엘리트 교육을 받은 금수저마저도 인종 때문에 차별받는 경험을 한 간디는 비로소 식민통치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멸시는 남아프리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해 백인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간디는 이 법의 폐기를 주장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899년 제2차 보어전쟁 발발 소식이 들려오자 간디는 영국군에 입대했다. 그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의무병, 후송 같은 후방지원을 주로 맡았다. 전공을 인정받은 간디는 남아프리카 내 소수민족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본격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을 개시한 것은 1906년 사티아그라 운동이 시작이다. 모든 인도인에게 지문 등록을 요구하고 서류 소지를 의무화하는 법안에 반발한 이 운동은 7년만에 법 폐기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간디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영국 정부로부터 자치권 보장을 약속받고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적극적 모병 활동에 나서며 훈장까지 받았으나 자치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간디는 협상 대신 저항을 택했는데 그가 벌인 영국 상품 불매운동과 정부 기관 보이콧 등은 비폭력을 기조로 하고 있다. 힌두교도와 대립하던 자국 무슬림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적극 대화에도 나선다.
2차 세계대전 후 인도는 독립을 이뤘지만, 무슬림 세력이 영국의 회유에 의해 파키스탄을 건국하면서 나라가 둘로 분리됐다.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고까지 칭했고 단식을 불사하며 종교간 화합과 민족단결을 주장했다. 하지만 서로 반목하던 힌두교와 이슬람 신자들 일부는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힌두교 과격파 나투람 고드세에 의해 암살당했다. 해방 후 민족간 내분을 봉합하려다 암살당한 한국의 김구, 여운형이 연상되는 안타까운 결말이다.
한편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식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심지어 음식은 그가 비폭력 투쟁에서 내세운 수단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소금 행진’이 대표적이다. 1930년 제국주의 영국은 인도로 수입되고 생산되는 모든 소금에 세금을 매긴다고 통보했다. 가내에서 소금을 만들면 불법으로 간주해 처벌한다는 것. 간디는 “차라리 바다에서 소금을 가져다 먹자”며 군중을 이끌고 아흐메다바드에서 단디까지 360km을 행진했다.
간디는 유년 시절부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랐는데, 이 두 종교에는 아힘사라는 비폭력 신앙이 있다. 살생과 육식은 나쁜 카르마를 쌓는 행동으로 금기시됐다. 오늘날에도 인도는 채식 인구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비폭력이라는 그의 투쟁 방식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생전에 간디는 채소, 곡류, 과일을 위주로 먹었고 향신료나 익힌 음식, 자극적인 음식을 피했다. 다만 식성 자체는 매우 까다로워 의외로 식비가 많이 들었다고 하며 자주 먹는 대식가였다.
그는 맹물 대신 레몬주스에 탄산소다를 넣고 꿀을 탄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간디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는 라우키(lauki)라고 불리는 ‘박’이다. 지금은 낯선 식재료가 됐지만 박과 식물인 동과는 중국 남방 지역에서 많이 쓰이며 과자 재료로도 사용된다. 시원하고 담백한 박은 어떤 부재료와도 어울려 활용도가 높다. 인도의 대표 유적지 타지마할에 가면 건축물을 오마주해 동과를 흰 설탕에 조려 만든 새하얀 당과를 기념품으로 판다.
가지를 특히 즐겨 먹었다고도 한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 있지 않지만 가지는 인도의 국민 채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다양한 레시피가 발달했다. 바이간 바르타라는 가지요리는 구워서 부드러워진 가지를 곱게 으깨 볶아낸 것인데 지역에 따라 다른 향신료 조합으로 개성 있는 맛을 연출한다. 여기에 루와 토마토 등을 첨가한 커리도 있다. 고기 없이도 풍성한 맛과 식감을 살린 채식메뉴다. 가지를 얇게 썰어 바삭하게 튀기고 소스를 찍어먹는 파크라는 널리 사랑받는 간식이다.
간디가 곡기로 선호한 음식은 쌀과 렌틸콩, 차파티다. 길쭉하고 푸석한 식감의 인디카 쌀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동 등지에서 주로 소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남미’라고 해서 그리 선호하는 종류가 아니지만 밥을 지어 반찬을 곁들이는 대신 부재료와 함께 푹 찌거나 볶아먹었을 때 오히려 그 진가가 살아난다. 찰지지 않고 거친 조직이 자포니카 쌀보다 양념을 훨씬 잘 흡수하기 때문이다. 렌틸콩은 최근 들어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는데 콩 수프인 ‘달’은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무거운 식사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좋다.
남인도에서 쌀을 주식으로 선호한다면 북인도의 주식은 빵이다. 인도 빵은 미리 구워 놓으면 금방 뻣뻣해지기 때문에 식사 때 바로 만들어 따끈하게 제공된다. 가장 대중적인 차파티는 발효 없이 동글납작하게 빚은 반죽을 팬에 굽는 것이다. 이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빵이 인도 레스토랑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난’으로 발효를 거친 반죽을 화덕에 붙여 굽는다. 차파티 반죽을 기름에 튀기면 마치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이를 ‘푸리’라고 하며 간식이나 잔치 때 먹는 빵이다. 그밖에 안에 감자 반죽과 기버터를 채워 납작하게 구운 빠란타, 인도식 피자라고 할 수 있는 쿨차 등도 있다.
인도인의 식생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유와 유제품이다. 우유는 힌두교 천지창조 신화에까지 등장 할만큼 신성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정제 버터인 ‘기’는 한국의 고추장만큼인 중요한 식재료이며 요거트 ‘다히’는 특히 간디가 매끼 챙겨 먹었다고 한다. 날씨가 더운 지역이다 보니 인도 요리에는 매운 양념이 자주 쓰이는데 요거트의 유지방 성분은 입안의 매운 느낌을 중화시켜 준다. 다히를 묽게 만들어 과일, 향신료 등을 첨가한 음료가 바로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라씨’다.
이런 유제품은 소, 혹은 물소젖으로 만든다. 물소젖은 우유에 비해 유분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백종원을 통해 유행한 ‘카이막’도 원래는 물소젖이 원료이며 이탈리아 대표 치즈인 모짜렐라도 ‘부팔라’, 즉 물소젖을 원조로 친다. 간디의 또 다른 최애 메뉴 ‘페다’라는 치즈는 작은 공 형태의 물소젖 치즈인데 디저트로 활용하는 일이 많다. 달달하고 꾸덕하게 먹는 ‘라스굴라’와 갈색으로 튀긴 치즈를 꿀처럼 단 로즈 시럽에 적신 굴랍자문은 인도 레스토랑에서 종종 후식으로 내준다. 얼얼할 정도의 단맛이 인도식 디저트의 특징이다.
현대 인도의 음식문화에는 재미있는 점 하나가 있다. ‘단체급식’이라는 게 드물고 대신 도시락 배달 산업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종교가 워낙 다양한 탓에 모두의 계율에 맞는 식사를 제공하기 어려워 아예 맞춤 주문을 하는 식이다. ‘신’을 가리키는 단어만 수십 종류에 이를 만큼 민족과 종교, 신념이 제각각인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일은 간디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당장 간디 본인 역시 성인에 가까운 이미지와 동시에 수없는 구설과 이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하고 불완전한 모습이 인류 문화의 다양성을 낳은 원천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