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와 전통차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교될 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을 꼽자면 역시 다산 정약용이 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더 낫게 하는 일에 고군분투한 관리이면서 거중기를 발명한 과학자, 천주학을 받아들인 혁명가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팩션 작품에 정약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간 정약용에게는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를 아끼고 신뢰하던 정조가 승하하자 곧장 직격탄을 맞게 된다.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형제들이 줄줄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다. 두 형들 중 정약종 아이구스티노는 순교했으나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택헸다. 천주교인이면서도 시복시성 대상에 속하지 못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정조대왕과는 영혼의 단짝과 같은 관계였지만 그에게 가장 큰 고역은 술자리였다.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주의였던 정조는 옥필통에 소주를 가득 따라 정약용에게 ‘원샷’을 권했다. 이 옥필통은 붓을 꽂는 용기였기 때문에 용량이 약 500cc를 넘었고, 술 역시 세 번 증류한 알코올 도수 40도 이상의 독주였다. 정조가 즐겼던 이 술은 삼해주(三亥酒)라고 해서 돼지를 상징하는 해(亥)일에 세 번 증류한 소주로 희석식 소주와 달리 코냑과 비슷한 강렬한 풍미를 낸다.
이런 독주를 원샷해야 했던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폭음을 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고 한다. 대신 그가 즐겼던 음료는 차(茶)였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차문화가 쇠퇴했다고 알려졌지만 제다법 자체는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양반들 중에는 여전히 차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에 차문화가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굳이 꼽자면 ‘비용’ 때문이다.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는 차나무는 공물로 수탈당하기 일쑤였고, 수질이 좋은 지역에서는 굳이 차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누룽지로 끓인 숭늉은 차의 완벽한 대체제였다. 더구나, 한중일 삼국 공통으로 차는 서민과 거리가 먼 사치품이었고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대화 이후의 일이다.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에서/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지금은 보리 말릴 계절인지라/ 기도 피고 창 또한 돋아났겠네./ 궁한 살림 장재함이 습관이 되어/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이따금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스님의 숲속 차 도움을 받아/ 육우의 차솥을 좀 채웠으면/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엇이 다르리.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정약용이 남긴 이 시의 제목은 ‘걸명시’다. 당시 강진에 유배를 가 있던 그는 부실한 식생활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승려 혜장, 초의선사는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 야생차의 어린잎을 직접 덖은 차를 정약용에게 자주 보내주었다. 향기로운 차가 정약용에게는 ‘힐링’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차의 빛깔과 제법에 대해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차를 보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지만 내심 절박함을 읽을 수 있다. 마치 수년 전 유행한 인터넷 밈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라면 끓여주세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문여가는 옛날 대나무를 탐하더니/탁옹은 지금 차를 욕심낸다오./더구나 그대는 다산에 살고
산에 널린 것이 자색 차순이거늘, 제자는 마음이 후해도/ 그 선생은 예법이 아주 냉정하구려.
일백 근이라도 마다 말고/ 두 꾸러미 다 주었으면 하오./ 주지 않으면 한 병 술을 마시고도
오래도록 숙취에서 깨지 못하잖겠소./ 언충의 오지그릇 비어 있고/ 헌원미명의 솥을 채워 주지 않다니./ 사방에 곽란 앓는 자 많거늘/ 약을 청하면 무얼로 구제하겠소./ 푸른 시내 위 달이/구름 헤치고 맑은 얼굴 내밀듯 해 주오.
한번은 초의선사가 제자 색성이 정약용에게 차를 보낸 것을 알고, 만들어둔 차를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정약용은 “그걸로는 모자란다”며 더 보내 달라고 재촉한 것이다. 공직자의 덕목을 강조하고, 실학으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던 그의 이미지와 자뭇 상반되는 모습이다. 좋아하고 아끼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린애가 되는 게 사람인 듯 하다.
정약용이 즐겼던 차는 장기 보존이 가능한 ‘떡차’다. 한방에 조예가 깊었던 정약용은 한방의 구증구포 방식을 응용해 차를 달이고 농축해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오로지 한반도에만 있었다고 하니 그를 떡차의 선구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 그는 다산초당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직접 차를 제조한다. 유배생활의 고단함을 ‘덕질‘로 극복한 실학자의 소탈함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