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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낳은 지독한 식탐

폭군 연산군과 궁중음식

by Sejin J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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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가 연일 화제다. 미녀 셰프 임윤아는 폭군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매회 호화로운 메뉴를 준비한다. 미각이 예민한 왕 이채민은 낯선 음식이지만 그 맛을 제대로 꿰뚫어본다.


원작소설은 연산군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지만 드라마는 역사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이름을 연희군으로 바꾸고 장녹수는 숙원 강씨로 변경했다. 다만 연산군이 모티브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으며, 아이돌 스타일의 이채민이 왕 역을 맡은 것도 요즘 스타일 미남이었다는 외모 고증을 반영한 듯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퓨전사극인만큼 실제 역사는 드라마처럼 코믹+로맨틱한 스토리가 아니다.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막장드라마 뺨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이 그의 광기를 부추겼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나, 이와 별개로 쾌락에 약한 성정을 타고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선조인 태조 이성계를 닮아 무인의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또 예술가적인 면모도 있어 시와 그림을 좋아하고, 꽃과 나무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그는 각지에서 모란, 치자, 동백, 장미 같은 꽃들을 들여오게 했으며 후원에 1만 그루의 영산홍을 심는 등 화단을 꾸미는 데 공을 들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고가 낭비되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데 있다. 특히 음식에 대한 집착이 커서 값비싸고 희귀한 식재료를 구해 오게 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는 세금에는 쌀과 옷감, 특산품이 있었는데 이 중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특산품이다. 과일이나 해산물은 운송 과정에서 부패하기 쉬운 데다, 지방관들이 수탈하기 가장 편한 대상이었다. 각종 특산물을 쌀로 대신하는 대동법이 시행된 것도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자는 취지였다.


연산군은 달콤한 과일 종류를 즐겼던 듯 하다.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에 청포도를 올려 시원하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런가 하면 제주에서밖에 나지 않는 귤을 좋아해 직접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키위와 비슷한 다래도 넝쿨째 뽑아 올리라고 명했다.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과일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사당, 빈랑, 괘양, 용안, 여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사당은 설탕의 옛말로, 사탕수수가 나지 않는 조선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병을 앓았을 때 설탕을 먹고 싶어 했으나 찾을 수 없었고, 문종은 어머니의 영전에 뒤늦게 구한 설탕 단지를 올리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왕비도 쉽게 먹지 못할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빈랑 열매는 대만·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껌처럼 씹는 기호품으로 겉껍질은 약재로도 쓴다. 괘양은 허브의 일종인 회향이다. 용안은 중국 남부 지방에서 나는 포도알 같은 식감의 과일인데 말려서 약용했다고 한다. 여지는 유명한 양귀비가 가장 즐겨 먹었다는 과일이다. 당 현종은 그녀를 위해 여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배에 실어왔다.


연산군은 또 사신에게 중국의 수박을 구해 오라고 했으나 장령 김천령이 “우리나라 수박 맛과 크게 다르지 않고 가져오는 동안 부패할 수 있다”고 간언하자 후일 그를 능지처참에 처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왕을 두고 후대 학자들은 연산군이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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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고기도 연산군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그는 사슴의 꼬리와 혀를 전국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어두육미’라고 해서 옛사람들은 지방질과 근육이 적절히 조화돼 씹는 맛이 있는 꼬리 부분 고기를 선호했다. 궁궐이나 대가집 잔칫상에는 반드시 소꼬리찜이 올라왔다. 혀 역시 나오는 양이 적은데다 식감이 좋아 고급 식재료에 해당한다. 연산군은 진상되는 꼬리와 혀가 부족하거나 질이 떨어지면 지방관들을 고문하는 등의 패악을 부렸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금기시되는 식도락을 즐기기도 했다. 바로 새끼 밴 암소의 태를 자주 먹었던 것. 농사 밑천인 소를 잡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고, 우유 역시 송아지의 성장에 방해된다며 왕의 보양식으로만 허용됐다. 흉년이 들면 왕들은 소고기 반찬을 끊을 정도였는데 오히려 연산군은 잔치마다 소고기를 쓰라는 전교를 내렸으며, 태어나기 전 송아지까지 잡아먹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양기를 돋우는 이른바 춘약에도 집착했다. 남성의 양기에 좋다고 알려진 백마를 잡아오게 했는데, 북쪽과 남쪽을 잇는 선을 자오선이라고 하는데 남쪽을 뜻하는 오(午)자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어린 노복들을 모아 귀뚜라미와 잠자리, 베짱이를 잡아 오라고 명했다. 잠자리는 양기를 돋우고 신장을 보호한다고 믿어졌다. 메뚜기가 정력제로 통했던 이유는 튼실한 뒷다리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진상을 요구한 식재료는 돌고래 고기, 왜전복 등 끝을 모를 정도다. 연산군일기에는 “경기 감사에게 돌고래·자라 등을 산 채로 잡아 올리게 하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바다에서 산 고래를 잡아오지 못했다며 지방관을 파직한 적도 있다. 식용으로는 큰 가치가 없다는 돌고래나 우리나라 전복과 거의 같은 일본산 전복을 찾은 것은 맛을 제대로 알기보다는 그저 희귀한 음식에 집착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후궁들에 대한 질투와 분을 이기지 못해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의 자제력 없는 행동을 보면 아들 연산군이 모후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더구나 식탐은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고 타락하기 전부터 있던 것이다. 어쩌면 연산군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불행했던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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