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 책상 위에 그어진 선이 떠오릅니다. 내 책상 반쪽과 짝꿍의 반쪽을 나누던 그 선은 단순한 낙서 같았지만, 어린 제게는 중요한 경계였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자리야." 그 선은 내 공간을 지키는 방어선이었고, 짝꿍과의 작은 다툼을 막는 평화의 선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물리적인 공간을 나누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선이 관계 속에서 꼭 필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상대의 영역을 침범할 위험이 있고, 반대로 너무 멀어지면 마음의 연결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사이의 균형을 뜻합니다.
전혜진 작가는 '나는 나를 갖고 싶다'에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상대를 소유하려는 충동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온전한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자신만의 경계를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말합니다. 가까워지는 것만이 관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선을 지키는 일이 관계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듭니다.
경계를 지킨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차가운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가까운 관계일수록, 특히 가족이나 연인처럼 일상에서 자주 부딪히는 관계일수록 경계를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서로를 상처 입히는 선을 넘게 됩니다.
결혼은 이런 점에서 특별한 관계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다름은 쉽게 충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관계는 더 깊어집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경계를 지키며 존중할 때, 품격 있는 관계가 시작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까움입니다. 선을 지킨다는 것은 상대방의 자유와 나의 자유를 모두 존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신뢰와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경계를 존중하며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는 우리가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됩니다. 책상 위 작은 선이 그랬듯, 우리 삶에서도 이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계는 더욱 따뜻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