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미쳐가는 자의 중간 일지
지난달 183km를 걸었다. 국토 종주를 한 건 아니고, 동네를 걸었다. 서울에서 경북 김천까지 200km 정도 되니 한 달 동안 걸어서 경북 어딘가에 도착한 셈이다. 걷기 모임에 들어가게 되면서 조금은 작정하고 걸은 것도 있지만, 걷는 것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하다. 몸이 피곤해서 혹은 체력이 남아서, 마음이 복잡해서 혹은 별 고민이 없어서, 그러니까 거의 매일 어떤 상황과 기분이든 되도록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오로지 걷기 위한 시간을 내기 위해 하루 일정을 조정한다. 걸을 시간이 나서 걸으면 기분이 좋고, 에너지를 쓰고 집에 돌아오면 잠도 잘 온다.
걷기 모임에 들어간 건 2월 초였다. 바닥 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올 한 해 일하지 말고 나에게 집중하자 생각했는데, 회복이 되고 있긴 한 건지 의문스러울 만큼 무기력과 불안함과 외로움에 파묻혀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 조금 벗어났을 때, 몇 년째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5km씩 러닝 하는 친구를 만났다. 나도 몸을 쓰는 무언갈 시작하자 마음먹었고, 처음엔 자전거를 같이 탈 사람을 찾았다. 그러다 지금의 걷기 모임을 발견했는데 등산, 자전거, 걷기, 클라이밍 등 다양한 액티비티도 하고 있었다. 체력조차 바닥이었던 나는 모임 사람들과 자전거를 한 번 타고난 뒤, 도저히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걷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전에도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오직 걷기 위해 걸은 적은 거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를 이동할 때 대중교통 대신 걷는 걸 수단으로 선택하는, 딱 그만큼의 선호도였다. 걷는 것이 목적인 산책이라면, 며칠 동안 집에만 콕 박혀 있어 답답했을 때 밖에 나와 1시간 미만으로 걷는 수준이었다. 산책을 크게 즐기지 않았던 이유는 걷는 행위가 우울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는 데 나에겐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잡념들을 물고 늘어지면서 걷다 보면, 집 밖의 공기가 상쾌한지도 모른 채 돌아올 때가 더 많았다.
모임에서 열리는 걷기 번개는 주로 사람들이 퇴근한 저녁 시간에 시작된다. 4명 미만의 사람들이 모여 동네 한 바퀴(약 8km)를 러닝머신 4-5km/h의 속도로 1시간 30분쯤 걷는다. 여러 번 같이 걸었던 사람과 걸을 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과 걸을 때도 있다. 처음엔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접점이 없었을 사람들과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걱정스럽기도 했다. 내향적인 면이 많은 내가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말만 뱉을 수 있을까, 가식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 중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나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어느 정도 정리됐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차치하고 계속 걸을 만큼 좋은 점이 명확하다.
먼저 걷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는 점, 그리고 빠른 속도로 걷는다는 점 때문이다. 경보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걷는 속도만큼 이야기들이 빠르게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개중에는 만약 앉아서 각 잡고 이야기했더라면 진지하게 들었을 무거운 주제도 있는데, 이상하게 걸으면서 들으면 ‘와이 쏘 시리어스?’의 자세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나도 고민을 말하다가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많다. 또 다른 좋은 점은 근심 걱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사람들과 떠들며 걷다 보면, 그 시간과 거리만큼 나와 고민 사이가 벌어져 있다는 것이다. 걷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마음을 짓눌렀던 고민의 무게가 그만큼의 무게였던가 싶다가, 매듭을 짓기도 전에 피곤해서 잠이 든다. 때론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의 내가 뭘 고민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5월의 나는 1월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때의 나는 아무 자극이 없어도 힘들었다. 벗어나려 갖은 노력을 해도 매일 망망대해에 떠있었고, 가슴을 압박하는 느낌에 종종 어깨와 등이 아팠다. 지금은 정말 괜찮다고 자부하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잘, 많이 흔들린다. 하지만 5개월 동안 어떤 방향으로든 변했고, 지금 보니 그 시작 중 하나가 걷기였다. 이젠 혼자 걸을 때도 속도를 낸다. 예전엔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실내에서 실외로 공간만 바뀐 채 잡념에 잠긴 시간이었다면, 지금은 걷는 것에 집중해 잡념을 멈추는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이 ‘잡’념임을 아는 시간이다.
기록하진 못했지만 2월부터 걸은 시간을 대략적으로 잡아도 일주일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인데, 글쓰기와 더불어 나를 ‘나’라는 개미지옥에 꺼내 준 시간이다.